낯선 곳에 나를 놓아 보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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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큐시트] 마을 운동가 윤미숙 씨를 만나다

ⓒ박재철 CBS PD

[PD저널=박재철 CBS PD] 피디는 판을 짜는 사람이다. 그 판이 커질수록 그리고 신명이 날수록 능력치가 웃도는 피디다. 지나가는 사람도 고개를 돌리고 이내 발길까지 돌리게 한다면, 거기에 몸이 굼뜬 사람도 절로 흥에 겨워 어깨를 들썩이게 한다면, 피디로서 제대로 판을 깐 셈이다. 마을 운동가 윤미숙 씨를 인터뷰하면서 든 첫 번째 생각은 “이 사람은 타고난 피디다!”였다.

그는 마을을 대상으로 기획을 하고, 그 기획이 실현될 수 있도록 세심하게 때론 과감하게 연출한다. 그의 특징은 마을, 그중에도 특히 발길이 끊기려는 섬마을에 심폐소생을 하는 기술이다. 가뭄 든 논에 물을 끌어와 해갈시키듯, 관의 예산을 끌어와 마을에 생기와 활력을 돌게 하는 일, 그러니까 마을 재생사업이 그의 ‘본캐’라 하겠다. 우선, 피디로서 그의 자질이 유감없이 드러나는 부분은 ‘기획의 참신성’이다. 철거지를 관광지로 탈바꿈시킨 통영의 ‘동피랑 벽화마을’ 프로젝트, 화석연료를 쓰지 않고 오직 태양열과 지열로만 에너지원을 공급하는 탄소 제로(Zero) 섬 ‘에코 아일랜드’ 연대도, 일흔이 넘는 할머니들에게 커피 바리스타 교육을 제공하고 실제로 커피숍을 오픈해 브랜드화한 ‘욕지도 할매 바리스타’, 국내외 공공미술가들을 초대해 섬 곳곳에 이색적인 쉼터를 만들어 걷기 명소를 탄생시킨 ‘섬 티아고(스페인 산타아고에서 따옴)’ 신안 12사도 순례길, 일(Work)에 휴가(Vacation)를 접목한 ‘워케이션’ 두미도의 섬택근무, 처음 들어도 이게 가능할까 싶은 기획들을 그는 하나둘 현실화해 나갔다.

“제가 이 일을 하면서 제일 싫은 말이 ‘그게 되겠어요?’였어요. 그냥 우리 엄마, 우리 아부지 일이라고 생각을 하면 다 됩니다. 내 동네의 일이라고 생각하면 어떻게든 방법이 생겨요. 저는 주민들한테도 ‘엄마, 아부지’라고 부릅니다. 욕지도 바리스타 할 때도 ‘우리 엄마, 노후에 뭐 웃을 일 없을까? 적게나마 용돈이라도 되는 일이 없을까?’ 하다가 벌인 일이에요.”

마을 환동가 윤미숙 씨 ⓒ박재철 CBS PD

그의 많은 에너지는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에 쓰인다. 프로그램이든 프로젝트든 그 성공 여부는 결국 사람의 마음을 얻느냐이다. 가깝게는 상사나 동료, 멀게는 시·청취자의 마음을 얻어야 하는 숙명이 피디에게는 있다. 그의 책 <춤추는 마을 만들기>와 <어딘가에는 살고 싶은 바다, 섬마을이 있다>에는 사람 마음을 얻는 일의 ‘고단함’과 그 일을 멈추지 않는 ‘부단함’이 기록돼 있다.

‘어공’(어쩌다 공무원)인 그가 ‘늘공’(정통 관료)인 공무원과 함께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겪은 갈등과 화해의 과정은 그 자체로 만화경이다. 마을 주민들의 시큰둥한 반응, 돌덩이 같은 무관심에 지렛대를 끼워 넣어 좌우 흔들어 대며 흘린 땀방울의 양도 만만치 않다. 이런 류의 일은 사실 피디로 성장하는 루틴이자 통과의례이다. 속칭 세상사에서 제일 어렵다는 그 일, ‘사람 마음을 얻는 일’에 관해 그가 꺼내 놓는 이야기들은 노년 피디의 구술사와 흡사했다.

“섬 주민들이 빠진 스토리텔링은 백 퍼센트 망해요. 동피랑 벽화마을도 2년마다 한 번씩 새로 채색을 하게 했어요. 밑그림을 그리면 집주인이 나와서 부분 부분 색칠을 해요. 그래야 내가 그린 벽화라는 일종의 주인의식이 생깁니다. 미대생들하고 짝 지워줘서 2박 3일 같이 밥도 해 먹고 생각도 나누고 해야 ‘한팀’이 됩니다. 그런 관계 맺기가 있어야 성공해요. 주민들을 겉돌게 하는 게 아니라 그 속으로 끌어들여야 해요.”

경남 통영시 동피랑 마을. 2014.08.27 ⓒ뉴시스

무엇보다 피디로서 그가 가진 가장 큰 덕목은 ‘대상에 대한 사랑’이다. 그는 섬을, 섬사람을 애정한다. 음악 피디가 음악을, 교양 피디가 인문학을, 다큐 피디가 현장을 사랑하듯, 거제도가 고향인 그는 섬과 섬사람에 대한 사랑이 웃자라고 있다.

“‘색깔 멀미’라고 들어보셨어요? 외지에서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섬을 찾으면 현지인들은 시각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아요. 거기에 각종 쓰레기와 소음만 남기고 떠나죠. 제가 섬 프로젝트를 기획할 때 어디든 되도록 당일치기가 되는 곳은 안 합니다. 그곳에서 1박이 꼭 될 수 있도록 해요. 섬사람들, 제일 잘하는 게 뭐예요? 자식들 찾아오면 맛있는 거 먹이고 재우는 일이에요. 민박을 치고, 빨랫감이 나와 세탁일도 해야 용돈벌이가 됩니다. 전 자주 전화 걸어 “어매, 오늘 얼마 벌었노?” 물어요. 후배 활동가들은 이런 절 보고 가끔 속물이라 하지만 전 그냥 웃고 말아요. 그게 제가 섬을 사랑하는 방식입니다.”

사람들이 계속해서 찾아오고, 일거리가 만들어지고, 주민들이 직접 돈을 버는 효능감이 있어야 재생 프로젝트의 지속 가능성이 생긴다고 그는 믿는다. 삶은 단막극이 아닌 연속극이기에 자립과 지속은 그의 사랑이 품은 주요 레퍼토리다. 지금의 그를 키운 건 팔 할이 여행이다. 여행과 일이 분리되지 않는 삶을 산 셈이다. 앞서 열거한 피디로서의 자질 역시 큰 부분 여행에 빚지고 있다. 마을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살피는 일로부터 여행은 시작된다. 그 사이사이, 자신을 다독이는 사적인 여행의 시간도 있었으리라. 마지막으로 그에게 여행이란 무엇인지 물었다. 그리고 마치 준비되었지 싶은 대답이 돌아왔다.

“낯선 곳에 나를 놓아 보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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