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널리즘이 살아남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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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필독도서 69] 저널리즘 선언 : 개혁이냐, 혁명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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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저널=오학준 SBS PD] 두께가 얇지만, 내용의 무게를 달아볼 저울이 있다면 크게 기우뚱할 책들이 있다. 바비 젤리저, 파블로 J. 보즈코브스키 그리고 크리스 W. 앤더슨의 <저널리즘 선언>은 그런 책들 가운데 하나다. 얇지만 만만한 책은 아니다.

그들은 오늘날 저널리즘 제도가 ‘정보원, 규범, 수용자’라는 세 가지 차원에서 위기를 겪고 있다고 말한다. 저널리스트들은 정보원으로부터 소재를 확보하고, 그것을 일정한 규범에 따라 뉴스로 생산하며, 이를 소비한 수용자는 의견을 형성하고 이를 자신의 사회적, 정치적 행위에 활용한다. 이 뉴스의 생산과 소비를 아우르는 전체 과정이 저널리즘일 텐데, 저자들은 모든 과정이 전부 위기에 빠져있다고 말하는 셈이다.

월터 리프먼은 <여론>에서 ‘정보국’이라는 제도에 대한 규범적 주장을 펼치며 20세기 내내 민주주의에서 저널리즘의 역할을 이해하는 지배적인 설명을 내놓는다. 복잡해진 근대 사회에서 시민은 모든 사안을 파악할 지적 노동을 감수할 여력이 없다. 동시에 대의제가 확대되면서 공적 업무나 산업 분야의 의사결정을 담당하게 된 전문가들은 양질의 피드백을 원한다. 저널리즘은 그들이 업무를 더 잘 수행할 수 있도록 엘리트 사이의 뉴스 생산과 소비를 돕는 기구로 기능했다. 저널리즘은 엘리트와 민주주의의 매개인 것이다.

저널리즘 선언 개혁이냐 혁명이냐
저널리즘 선언 : 개혁이냐 혁명이냐

다만, 이 때문에 뉴스 보도는 일반적인 여론의 지형보다 엘리트 사이의 합의나 분열에 의존하게 된다는 저널리즘 ‘색인화’ 현상이 일어난다. 또한 언론학자 대니얼 할린이 발견한 바처럼, 언론인들은 사회적-정치적 문제가 자신들이 규정한 ‘정당한 논쟁’의 영역에 속할 때에만 보도 균형을 맞추고 신중하게 접근한다. 그렇다면 엘리트들이 자신의 필요에 따라 사회적 합의를 논쟁의 대상으로 유도하거나 정당한 논쟁을 일탈의 영역으로 밀어내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저자들은 실제로 특정한 정치 세력들이 자신들의 특권적 위치를 이용해 헛소리를 끊임없이 뉴스가 되도록 행동한다고 지적한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에 복무할 마음이 없는 이들이, 그 이념의 산물인 저널리즘 제도를 이용하는 상황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되고 있으며, 이들에 대한 대중의 신뢰 상실은 미디어에 대한 대중의 신뢰 상실로 연결되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저널리즘 제도 내에서 통용되는 뉴스 생산의 규범들은 사실 유럽과 미국의 산업 자본주의 국가, 그 안에서도 지배적 인종의 시선을 내면화한 게 아니냐는 의심에 시달리고 있다. 뉴스룸 안에서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는 젠더, 인종, 계급, 민족, 직업적 차별은 은폐되고 있지만 이 규범들에 대한 급진적인 문제제기는 아주 드물게 이루어지고 있다. 더욱이 중립, 불편부당, 공정과 같은 규범들을 이용해 자신의 혐오 발언을 적극적으로 확산시키는 이들의 존재는 규범의 효능을 의심케 한다.

심지어 많은 수용자들은 뉴스를 사실의 이해나 정보 획득을 위한 용도보다는 일종의 사회적 의례를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적어도 저자들이 보기에,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정치적, 사회적 성향을 지니고 있는지 상대방에게 알리고 증명하는 수단으로서 뉴스를 소비하고 공유한다. 어느 신문사에서 혹은 어느 방송사인지가 중요하지, 뉴스의 내용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을 마주치는 건 오늘날 드문 일이 아니다. “매스미디어는 더 이상 수용자가 대규모로 존재한다는 것과 수용자가 뉴스를 열렬히 필요로 한다는 것을 동일시할 수 없는 실정이다.”

그러니 좋은 기사를 쓰면, 독자들이 읽는다는 가정은 안타깝게도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역사상 가장 수준이 높은 기사들을 집에서 편하게 접할 수 있는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은 뉴스 생산자들이 가치 있다고 생각한 뉴스를 더 많이 소비하지 않는다. 저널리즘 노동자가 여전히 수용자의 선호를 '계몽'할 각오가 되어 있는 한에서, 수용자들의 선호와 습관은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비록 좋은 기자들과 괜찮은 미디어 조직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널리즘은 수용자를 놓치고 있다. 언론 기업들의 수입 기반이었던 ‘관심’은 ‘관심 경제’의 사업가들 차지가 되었다. 수용자의 관심에 진지하게 반응할 마음이 없다면 광고를 없애고 구독료 중심으로 바꾼다고 한들 뉴스에 비용을 지불할 수용자를 찾긴 어려울 것이다. 개인이 스스로 뉴스를 생산하고 소비할 수 있는 시대에, 테크 기업들은 저널리즘 산업의 비즈니스 모델을 깔끔하게 접수할 준비가 되어 있다.

저자들은 주장한다. 저널리즘 제도에 복무하는 이들은 자기가 속한 세계의 조건을 잊었으며, 예전에 하던 대로만 반복하면 기존의 권위와 기능을 되찾을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고. 저널리즘은 언제든 소멸될 수도 있는 한시적 시스템이다. 자본주의로부터 독립적이지도 않으며, 수용자들의 삶의 중심에 얼마나 더 머무를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사회의 응집에 도움이 되기보다 사회를 분열시키는 데 속수무책으로 이용당하고 있기도 하다.

여러 사람들이 저널리즘 제도의 소멸이나 위기를 논한 지 오래지만, 대부분은 몇 가지 사소한 문제들만 해결하면 다시 예전의 ‘정상적’ 모습으로 되돌아가리라 기대한다. 하지만 이 책에서 논하는 저널리즘의 위기는 사소하지 않다. 자유주의-민주주의 이념 자체의 위기다. 그리하여 저자들은 오늘날의 변화된 물적 조건에 맞게 어떻게 저널리즘 제도를 새롭게 다듬어 낼 것인지 고민하기를 요청하고 있다.

그들이 내놓은 결론은 다소 추상적이다. 심지어 비교적 현실적 대안으로 제시되는 ‘개혁적’ 노선도 쉽게 달성하기 어려운 듯하다. 또한 책의 주장 가운데 신실하게 사명을 수행하는 저널리스트들의 반감을 살 만한 내용도 있다. 근거로 든 몇몇 사례는 일반화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한국에 곧바로 적용할 수 없는 지역적 차이도 뭉뚱그려져 있는 것은 불만이다. 다만 선언의 큰 방향에 동의할 독자라면, 이 거대한 말들 사이의 빈자리를 한 번 채워볼 만하다. 건강한 수용자와 다시 접점을 만들어보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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