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저널=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자식들. 우리에게 이 역할로 지칭되는 가족구성원들의 이미지는 이상하게도 고정되는 면이 있다. 아버지가 근엄한 어떤 역할이라면 어머니는 자애로운 역할이고 자식들은 부모를 공양하는 그런 이미지. 물론 지금은 이런 유교적 틀의 이미지에서 상당 부분 벗어나 있는 게 사실이지만, 그 잔상이 남아 저도 모르게 그 역할을 강요받거나 거기서 벗어나는 일을 허용하지 않는 고정관념은 여전하다. 하지만 지니TV 월화드라마 <남남>은 아예 시작부터 이런 고정관념을 깬다.
은미(전혜진)는 고등학생 때 진희(수영)를 가졌지만, 아이 아빠가 이 사실을 모른 채 전학을 가 싱글맘으로 딸을 키운다. 나이 차가 별로 나지 않아 모녀 관계라기보다는 자매에 가까운 은미와 진희는 그 역할도 어딘가 역전되어 있다. 싱글맘으로 여전히 남자를 만나고 싶고 데이트를 하고픈 욕망을 여전히 드러내는 엄마 은미를, 딸 진희는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걱정한다. 이것은 진희의 직업과도 연결되어 있는데, 경찰인 진희는 세상이 험하다는 걸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그래서 엄마 은미가 낯선 사람을 만나는 것조차 걱정 섞인 시선으로 바라본다. 은미는 진희에게 각자의 삶은 각자가 살아가는 것이라고 늘 쿨하게 말하는데, 딸도 이를 선선히 받아들인다. 물론 그런 겉모습과 달리 속은 남모르는 애틋함이 존재하지만.
자매 같은 모녀의 관계도 그렇지만, 남남이지만 진짜 가족 같은 은미와 미정(김혜은)의 관계도 그렇다. 어려서 아빠의 상습적인 폭력 속에 살았던 은미에게 미정은 자신의 집에서 같이 살자고 하고, 미정의 어머니도 이를 받아들여 이들은 가족이 된다. 핏줄로 연결되진 않았지만 미정의 엄마에게 은미도 엄마라 부르고, 진희를 미정은 딸처럼 여긴다. 가족이지만 타인만 못한 관계가 있을 수 있는 반면, 이처럼 남남이지만 진짜 가족 같은 관계가 가능하다고 <남남>은 말한다.
<남남>이 뒤틀어내는 새로운 가족상에 대한 이야기는 이게 끝이 아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진희의 생물학적 아버지인 진홍(안재욱)의 등장 또한 예사롭지 않다. 자꾸만 엄마 주변에 나타나는 진홍을 치한으로 여겨 수갑을 채우려 하자 은미가 어쩔 수 없이 진희에게 “네 아빠야.”라고 말하지만, 막상 진홍이 “내 딸”이라고 부지불식중에 툭 튀어나온 말에 은미는 발끈하며 “어디서 감히 내 딸이래?”라고 선을 긋는다. 그런데 이처럼 진홍과 자신의 딸 사이에 선을 긋는 은미지만, 그는 은근히 진홍과 사귀고픈 마음을 드러낸다. 즉 은미는 진홍을 사랑하는 사이로 사귀고 싶지만, 그렇다고 진희와의 부녀관계를 받아들이거나 부각시키지 않는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라는 것.
심지어 함께 여행을 가서도 진홍이 자꾸만 진희 신경을 쓰는 것에 은미는 신경질을 낸다. “나? 오빠 꼬시려고. 근데 왜 오빠 자꾸 진희 신경 써? 내 딸 오빠랑 상관... 없어!” 은미가 진홍에게 원하는 건 사랑이지, 진희로 엮어진 책임이나 의무가 아니다. 물론 은미와 진홍이 점점 가까워지면서 자연스럽게 진희와의 관계도 이어지고 그 과정에서 부녀 관계가 회복되는 건 받아들일 수 있지만, 선후 관계가 뒤집어져 진희가 딸이기 때문에 은미와의 관계도 회복하려 진홍이 나서는 건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남남>의 문제적 인물 은미는 모든 관계를 일단 남남으로 보고 시작한다. 심지어 혈연으로 엮어진 가족이라고 해도 처음에는 남남이라는 것이다. 그 남남이 진짜 가족관계가 되는 건 그 후에 이들이 엮어가는 관계에 달려있다고 은미는 말하고 있다. 제아무리 유전적 아버지라고 해도 따뜻하게 자식을 대하지 않고 폭력으로만 내몰았다면 그를 아버지라 할 수 있을까. 대신 남이어도 따뜻하게 자신과 딸을 보듬어 준 미정과 그 엄마가 진짜 가족인 이유다. 그래서 <남남>이 제시하는 우리 시대의 가족상은 일단 ‘혈연적 가족’이라고 해서 진짜 가족은 아니라는 전제로부터 시작한다. 진짜 보편적인 가족의 역할을 할 때야 만이 가족일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그 역할은 그래서 과거 혈연으로 모든 게 덮어지던 가부장적 틀로부터 벗어나는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