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속에서 배를 지키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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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어로도 악당도 없는 세상 17]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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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저널=박정욱 MBC PD] 멀리 하와이에서 끔찍한 산불 재난 소식이 들려온다. 하와이 마우이섬에서 발생한 산불로 많은 인명 피해가 났고, 막대한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하와이에서 63년 만에 발생한 최악의 자연재해라고 한다. 연일 불에 탄 채 무너져 내린 건물 사진과 들 것에 실려가는 사람들 사진이 기사로 전해진다. 참혹하다. 이 산불이 이상기후로 인한 것이라는 진단이 있기에 더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나는 불에 타버린 건물이나 숲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목숨을 구하기 위해 절박하게 피난하면서 간절하게 도움을 바랐을 사람들을 떠올린다. 지옥같이 불타오르는 마우이섬에서 그들은 얼마나 두렵고 막막했을까. 그 과정에서 가족이나 친구가 죽거나 다쳤다면 얼마나 마음이 찢어질까. 또한 생업의 터와 가족이 몸을 누일 집이 산불에 유린되는 걸 보면서는 얼마나 안타깝고 기가 막혔을까. 내가 이 재난에 유난히 마음이 쓰이는 건 최근 우리나라를 강타했던 폭우와 태풍 때문이다.

6호 태풍 '카눈'이 한반도에 상륙하기 하루 전날인 8월 9일, 내가 담당하는 프로그램에서는 다음 날 생방송에서 태풍의 이동 경로에 있는 현장을 연결하기로 결정했다. 카눈은 통영 부근을 통해 우리나라로 들어올 것으로 예보되고 있었다. 우리는 통영의 한 어민을 섭외했다.

태풍이 통영 가까이 접근한 시각, 방송 전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그 어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어디 계시냐는 작가의 질문에 어민은 담담하게 "배를 지키려고 밤새 항구에 정박해 놓은 배 안에 있다"고 답했다. 전화 너머로 그 대답을 듣고 있던 나는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대피를 해도 모자랄 판에 태풍이 몰아치는 상황에서 배를 지킨다며 바다에 있다고? 스튜디오에 나와서 방송 대기중이던 재난 전문가 역시 이를 듣고 경악했다. "빨리 대피하셔야죠." 통화 중이던 작가는 간곡히 청했다. 하지만 그 어민의 대답은 더 놀라웠다. "저만 나와 있는 게 아니에요. 다른 어민들도 다들 배 안에 있어요." 배는 어민들의 큰 재산일 것이다. 혹여나 태풍에 망가질까 노심초사하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재산보다 안전이 더 중요한 것 아닌가. 그분들도 모를 리 없건만 배를 지키고자 목숨을 걸고 태풍에 맞서고 있는 것이다. 배가 생업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재차 삼차 대피하시라 말씀드렸고 어민은 웃으시며 '좀 이따가 대피할게요'라고 답하셨다. 아, 정부에서는 대피 권고를 할 게 아니라 대피 강제 명령을 내려야 하는 것 아닌가. 먹구름이 낀 컴컴한 바닷가 항구에서 심하게 출렁이는 배 위에 올라 초조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악물고 있을 그를 떠올렸다. 도대체 먹고산다는 것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치열하게 살아가야 하는 걸까. 인생의 무게가 무겁게 느껴졌다. 다행히 태풍은 통영에 큰 피해를 입히지는 않고 지나갔다.

태풍 카눈 예상경로 MBC '뉴스데스크'
태풍 카눈 예상경로 MBC '뉴스데스크'

제작진은 지난 7월 집중호우로 산사태가 일어났을 때 방송 연결한 경북 예천의 한 이장님 안부도 궁금했다. 그때 산사태로 집이 파손되었던 분이다. 또다시 태풍이 온다고 하니 어떻게 대비하고 계신가 하여 전화를 걸었다. 근황을 여쭙는 질문에 이장님은 “지난 폭우 피해는 아직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복구해간다”고 소식을 전했다. 1층은 창문이 모두 뻥 뚫린 탓에 2층에서 온 가족이 머물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태풍 카눈이 몰려오면 또 집안에 비가 들이칠 것을 걱정했다. 이번에도 제작진은 산사태 위험이 또 있을 테니 대피하시라고 권했다. 하지만 그분 역시 집이 더 큰 걱정이었다. 관청에서 대피하라는 연락은 오는데 집을 버리고 가지는 못하겠다고 했다.

카눈은 이 물러간 이후에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누군가는 '이번 태풍 별거 아니네'라고 말할 수 있을 지 몰라도, 그 통영 어민과 예천 주민은 자신의 일터와 집을 지키면서 얼마나 절박한 마음으로 몰려오는 태풍이 무사히 지나가기를 기도했는지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과 20년 전만 해도 지구촌은 테러리즘으로 몸살을 앓았다. 하지만 이젠 자연재해가 훨씬 더 거대한 위협이라는 데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방송을 제작하는 이로서 불쑥 닥치는 재난에 뭘 어찌해야 하는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저 재난방송 매뉴얼을 지키는 것 말고 보다 나은 일을 세상에 할 수는 없을까. 아무튼 아직은 잘 모르겠다. 일단은 그 자연재해 속에서 이를 악물고 삶의 터전을 지키는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씩 기억해두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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