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펜하이머'가 본 오펜하이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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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해서 불행했던...크리스토퍼 놀란이 본 오펜하이머

영화 '오펜하이머'
영화 '오펜하이머'

[PD저널=홍수정 영화평론가] 때로 이미지는 언어보다 강하다. 이 말은 <오펜하이머>에도 잘 들어맞는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고, 물리와 정치를 포괄하는 방대한 서사. 여기에만 집중한다며 놓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오펜하이머>에서 서사만큼 중요한 것이 바로 이미지다. 서사가 오펜하이머의 역사를 전달한다면, 이미지는 그에 대한 크리스토퍼 놀란의 태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영화의 초반. 아름다운 장면이 등장한다. 아마도 오펜하이머(킬리언 머피)가 고심하는 분자의 세계를 이미지로 보여주는 장면일 것이다. 타오르는 불꽃. 떠도는 입자. 깨지는 유리. 진동하는 끈. 일련의 이미지는 물리학적 세계에 대한 오펜하이머의 순수한 열망과 탐구를 보여준다. 이런 이미지들을 이 글에서는 ‘초현실적 이미지’라고 표현하겠다. 그것은 몇 번 반복해서 등장하며 오펜하이머의 순수성과 천재성을 상기시킨다. 그가 남들이 보지 못하는 세계를 보고 있으며, 그 세계가 정치나 술수가 개입되지 않은 중립적이고 미학적인 세계임을 알게 하기 때문이다. 오펜하이머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그것을 바라보고는 한다.

영화의 후반, 의외의 순간에 초현실적 이미지는 다시 등장한다. ‘트리니티 실험’이 성공한다. 오랜 헌신은 결실을 맺는다. 바로 이 순간 스크린 위로 ‘버섯구름’이 피어오른다. 이 결정적인 장면에 도달하기 위해 영화는 몇 시간을 달려왔다. 이때 크리스토퍼 놀란은 독특한 방식으로 시퀀스를 연출한다. 과학자들이 고개를 들어 버섯구름을 본다. 너도나도 고개를 든다. 오펜하이머는 고글을 벗는다. 쏟아지는 빛에 안간힘을 쓰며 눈을 뜬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맨눈으로 그것을 보는 데 성공한다. 이때 놀란은 거듭해서 ‘본다’는 행위를 강조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나? 버섯구름. 어떻게 보이나? 잠깐, 바로 이 부분이 중요하다. 자세히 기억해 보자. 까만 밤하늘을 배경으로 서서히 피어오르는 버섯구름. 두렵고도 황홀한 광경이다. 카메라는 버섯구름에 좀 더 다가간다. 마치 꽃이 피듯, 파도가 몰아치듯 붉은 기체가 뭉글뭉글 피어오른다. 카메라는 표면에 바짝 다가가 버섯구름을 본다. 이때 카메라는 오펜하이머의 눈을 대신한다. 그것에 가까워질수록 버섯 같은 형상은 사라지고, 꿈틀대는 이미지가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익숙한 패턴의 연출. 이 이미지, 버섯구름을 클로즈업한 이미지는, 앞서 설명한 초현실적 이미지와 겹쳐진다. 지금 오펜하이머는 영화의 초반과 같은 태도로 버섯구름을 보며, 그 너머의 물리학적 세계를 보고 있다. 핵실험이 성공하는 그 순간, 그는 늘 염원해 왔던 세계의 비밀을 응시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이것이 놀란이 말하려는 핵심이다. 그는 버섯구름과 초현실적 이미지를 연결시키며, 핵실험 결과를 관찰하는 자리에 학문적 열의에 불타는 과학자를 앉힌다. 야비한 정치인도, 영악한 사업가도 아니다. 보지 못한 세계를 보겠다는 순수한 갈망이 그를 여기까지 이끌었다. 나치를 막겠다는 명분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영화상에서) 그것은 자주 흔들린다. 그보다 강력하게 오펜하이머를 휘어 감는 동기는 순수한 학문적 세계에 대한 열망이라고 놀란은 속삭인다.

영화 '오펜하이머'
영화 '오펜하이머'

그렇다고 <오펜하이머>가 책임을 회피하는 영화는 아니다. 오히려 영화는 오펜하이머의 죄책감을 자세히 보여준다. “그런 모욕을 견딘다고 사람들이 용서해줄 줄 알아? 아니야”라는 키티(에밀리 블런트)의 말을 통해 끝내 그가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못박기도 한다(대사 내용은 기억의 문제로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 또 핵공격으로 인한 피해를 보여주는 이 영화의 절제된 연출은 정석에 가깝다고 할 정도로 훌륭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영화는 줄기차게 오펜하이머의 순진함을 강조한다. 그가 ‘잘못하지 않았다’는 게 아니라, ‘몰랐다’고 항변한다. 어느 정도의 희생을 예상했지만 이 정도로 커질 줄은 몰랐다는 것. 그래서 영화의 초반부터 오펜하이머가 인간사에 어둡다는 언급이 반복된다. 그의 동료는 말한다. 그런 순진한(naiv) 태도는 위험해. 결국 그 순진함이 오펜하이머를 파멸로 이끌었다고 영화는 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의 후반에는 비애감의 정서가 진하게 감돈다. 오펜하이머는 자주 슬픔과 고독을 머금은 채 어둠속으로 고요히 사라진다. 눈여겨볼 것은 여기에 ‘운명적 비애감’이 섞여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명확한 잘못이 아니라, 숙명적인 비극을 떠안은 자가 느끼는 감정이다. 앞서 설명한 영화의 태도로 볼 때 오펜하이머가 비애감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는 학문에 대한 순수한 열정에 이끌려 핵개발에 매진했지만 지나치게 순진해 결과를 예측하지 못했고, 결국 희생자들에 대한 죄책감을 끌어안고 살게 됐다. 이것이 잔인한 운명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나.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등장하는 프로메테우스에 대한 언급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오펜하이머가 자신의 선의와 달리 고난을 겪게 되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돌을 들추면 뱀을 만난다’는 말 역시 그가 겪는 불행의 그의 의도와 무관하다는 뉘앙스를 전한다. 맞아, 오펜하이머에게는 책임이 있지. 하지만 의도한 건 아니야. 영화 <오펜하이머>는 순수, 순진, 선의로 뜨개질한 두터운 담요로 오펜하이머를 감싸고 그의 곁을 지킨다.

전기 영화가 반드시 중립적인 태도를 취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펜하이머>를 전기 영화로 분류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영화가 취하는 옹호적인 태도가 잘못이라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한 인물에 대한 시각이 균형 잡힌 영화라고 느끼지도 않는다. ‘나치를 막는다’는 이유가 정말 전부인가. 그는 자신의 결과물이 정치적으로 이용되고 통제되지 않는 상황을 어디까지 예상했을까. 몰랐던 것인가, 모르고 싶었던 것인가, 방조한 것인가. 그가 느끼는 죄책감의 형태는 어떠한가. 피상적인가, 현실적인가. (오해는 없길 바란다. 나는 지금 실존 인물 오펜하이머가 아니라 영화 속 오펜하이머에 대한 말을 하고 있다.) 영화는 이런 질문들을 뜯어보는 대신, 그의 입장을 옹호하고 그의 비애감에 동조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그러니 오펜하이머의 곁에 서서 그가 하지 못한 이야기를 대신 하겠다는 영화의 태도는 명확해 보인다.

영화의 마지막, 현자와 같은 모습으로 한 번 씩 나타나 조언을 전하는 아인슈타인(톰 콘티)이 그에게 말한다. 파멸의 연쇄반응이 이미 시작되었다고. 이것은 핵을 둘러싼 정치사 뿐 아니라 오펜하우머 개인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멀리서는 스트로스(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제독이 천천히 걸어오고 있다. 눈부신 빛을 내고 산화하는 핵폭탄처럼, 파멸을 향한 한 천재의 화려한 비극은 이미 시작되었다. 탁월해서 불행했던 남자. 순수하지만 순진했던 과학자. 놀란이 바라보는 오펜하이머다. 그의 태도는 부연할 필요 없이 선명하니 이제 판단은 관객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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