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사회'라는 막막함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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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필독도서 71] '이탈리아로 가는 길'

국회의사당 ⓒ뉴시스
국회의사당 ⓒ뉴시스

[PD저널=오학준 SBS PD] 조귀동 기자의 <이탈리아로 가는 길>은 시작부터 흥미롭다. 민주당 일각에서 수사로서 사용한 '눈 떠보니 선진국'이라는 워딩을 진지하게 수용해서, 한국 사회가 현재 당면하고 있는 정치와 경제 사이의 어긋남이 '선진국화'의 결과물임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민주당이 선전하는 '선진국' 워딩에는 그러한 어두움이 가려져 있었지만 말이다.

1980년대까지는 인구 증가, 경제 성장의 효과를 바탕으로 '중산층'이라는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편입되길 선호하는 계층을 두텁게 양성하자는 데 정부-기업-국민 사이의 느슨한 합의가 성립할 수 있었지만 선진국으로 편입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이 합의는 붕괴한다. '다음 기회'를 계속해서 제공한다는 명분 덕에 성공적으로 가려져 있었던 계급 불평등이 본격화되고, 여기에 다양한 균열의 지점이 덧붙어 상이한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들이 분화한다.

이전엔 같은 당을 지지할 수 있었던 이들이 서울-지방, 여성-남성, 제조업-비제조업, 유주택자-무주택자 같은 갈등의 선들을 효과적으로 가려주던 명분이 사라지면서, 정당의 지지기반은 매우 불안정하게 유동화된다. 민주당은 상위 중산층과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다른 집단들 사이를 중재하는 데 실패했고, 국민의 힘은 지지 세력의 이익을 보장하지 않는 보수 정당의 전형적 모순을 반복한다. 이는 단순히 정당의 역량 부족이 아니라 한국 정치의 구조적 특성이다.

조귀동 '이탈리아로 가는 길'

정당이 지지기반을 확고하게 다지고, 지지자들 사이의 이해관계를 조율해 '인민'의 이름으로 발표하며 헤게모니를 쥐는 방식으로 개혁이 되었다면 좋겠지만, 한국의 주요 정당은 대중적 접점을 최대한으로 늘려 팬덤을 형성하고 동원하는 데 유리한 인물을 내세우는 시도들만 반복했다. 정당 바깥의 인물이 국민의 이름으로 당권을 획득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먹고사는 문제와 정당정치를 정렬하는 대신 억눌린 분노를 동원한 카리스마적 지지자의 포퓰리즘 정치, 이미 세계적으로도 비슷하게 반복되고 있는 현상이기도 하다.

포퓰리즘 정치가 반복된들 실제 문제들이 해결될 리 없다. 고령화에 따라 복지 부담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증세 이외엔 답이 없지만 어느 정당도 세금을 늘이는 데 찬성하기 부담스럽다. 노동조합이 없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위한 복지가 절실하지만 정작 이들의 의견을 진지하게 수용하는 정당은 드물다. 2030 남자들이 처한 구조적 문제를 직시하기보다 그들이 다른 집단에 보이는 폭발적인 분노를 정치적으로 동원하려고만 시도한다.

먹고사는 문제가 아닌 쟁점들로만 정치가 재편되는 것은, 정치가 경제와 맞물려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한참이나 톱니바퀴가 헛도는 현상들을 세세하게 설명한 후에야 저자는 세계화, 고령화, 그리고 계급의 분화라는 당면 위기에 다시금 정치가 개입하고 제 역할을 할 방법이 무엇인지를 모색한다.

망해가는 나라라며 비난하고 냉소하면서 자멸의 길로 걸어가는 공동체를 구경하는 대신, 그 사회의 구성원 중 한 명으로서 어떻게 다시 정치가 본연의 역할을 해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책이기에 주변 사람들과 함께 읽어보고 싶다. 이 책에서 분류한 기득권에 속할 가능성이 매우 높지만, 어차피 이 나라를 떠서도 지금과 비슷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닌 이상에야 공동체의 운명과 나의 운명은 불가분의 관계다.

현실은 분명 암울하다. 현 정권은 공동체의 운명과 집권자들의 운명이 서로 별개의 것인 것처럼 군다. 자신들의 권력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 주어진 모든 폭력적 수단들과 수사적 행위들을 사용한다. 구성원들이 암묵적으로 지키고 있는 규칙을 '법'에 없다는 이유로 위반하면서 얻는 지대나 규제 차익을 지지자들에게 배분하는 방식으로 정권을 운용한다. 미래가 없는 것처럼 구는 이들에게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더욱 조급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 할 일은 해야한다. 당면한 과제들을 의제화하고 실제로 소외된 이들의 먹고 사는 문제에 개입해야 한다. 진보 정당이 역량을 상실해가는 상황에서, 어쩌면 배제된 사람들과 조용한 사람들의 곁에 서는 것만이 진보 정당의 유일하고도 정당한 미래일 수 있다. 헌법 개정을 통한 정치 체제의 변화, 책임 정치의 부활 등 저자가 내놓은 해법들에 정치에 관해 관심 있는 사람들이라면 민감하게 반응해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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