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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제문에 머리 박으며 울던 날

|contsmark0|프로그램을 만드는 pd가 되기 위해선 반드시 조연출 생활을 거쳐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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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연출생활이라…. 3년5개월의 지난한 세월.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다가도 어렴풋이 그리워지는 시절이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이기도 했고 꿈을 펼치는 첫장이었기에 모든 것을 즐겁게 받아들이는 인내의 시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참아도, 참아도 참을 수 없어 한바탕 소리 내어 운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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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낙엽 지는 가을이었다. 난 김병수 선배와 일하고 있었다. 당시 선배의 삶은, 가진 것 없고 죽도록 일만 하는 30대중반의 결혼 못한 노총각 신세이면서 프로그램에 찌들어 살고 있었고, 당시 노총각 동료pd들과 술과 담배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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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함께 한 프로그램은 <딩동댕 유치원>이었는데 당시 pd 2명과 ad 2명이서 겨우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삶은 피폐했다. 8월에 인사발령을 받고 석달 넘게 밤 12시 전엔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생활이 계속됐고, 복도는 뛰어다니는 곳이며 업무를 생각하는 곳이었다. 자판기 커피 한잔 먹을 시간조차 없었다. 업무가 손에 잡힌 10월 어느 날 정시퇴근을 하다 지는 노을을 보고서 태어나 바다를 처음 보는 소년처럼 감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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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은 가장 행복한 순간에 일어났다. 스스로의 업무능력에 만족하고 일이 손에 착착 잡히는 순간에. <딩동댕 유치원>은 녹화도 지루하고 힘들지만 그것을 편집하는 것도 꼬박 사나흘이 걸린다. 그날따라 편집하는 김병수 선배의 상태는 그리 좋아 보이질 않았다. 테이프의 상태도 좋지 않았다. 테이프는 계속 에러가 났다. 난 새 테이프를 계속 가져왔다. 이제껏 편집한 걸 다시 카피하고 편집하길 몇 차례. 테이프는 한가득 쌓여가고 1대1편집이 끝났을 땐 이미 새벽. 이렇게 살아야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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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잠시 붙이고 나와서 처음 한일은 말썽 많던 테이프를 자료실에 반납하는 것이었다. 정말 꼼꼼히 살피고 살폈다. 테이프에 붙은 레벨하나 하나를 확인하고 자료실에 테이프를 반납했다. “이 테이프들 반드시 파기 시켜주세요. 에러가 나서 편집을 할 수 없어요.” 테이프를 반납하고 나서도 난 정말 열심히 일했다. 그리고 완성편집을 위해 종합 편집실에 들어간 그날. 날씨는 청명했고 목요일이었으며 밤하늘에 별은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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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프 넣어.” 가만히 있으면 다 준비되는 것을 꼭 이렇게 명령조로 말하는 병수 선배. 그런데 화면이 이상하다. 내가 잘못 넣었나. 이것도 이상하다. 이것도. 또 이것도. 순간 머리가 멍해지면서 사무실에 두고 왔는지 모른다는 생각에 사무실로 뛰어 올라갔다. 온갖 생각들이 교차한다. 어디에 갔나. 사무실 어딘가에 있을 거야. 30m 남짓한 사무실에 오르면서 1000가지 생각은 한 것 같다. 여기도 없다. 테이프를 뒤척이기를 한참. 얼마나 지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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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된 거야”하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병수 선배가 서 있었다. 정말 커 보였다. “너가 무슨 수석 조연출이야. 테이프 하나 못 챙기는 게.” 고성이 오가면서 테이프가 얼굴로 날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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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따라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조연출들이 왜 그렇게 많이 남아있는지. 내가 잘못 보았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종합편집실로 뛰어가 테이프를 살폈다. 여전히 없다.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이제 어떻게 하지? 다시 사나흘을 편집해야하는가? 편집하면 방송날짜에 맞출 수 있긴 한 건가? 난 이대로 끝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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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선배가 왔다. 나와는 다르게 벌써 이성을 찾은 듯했다. 테이프를 집어던지고 미쳐 날뛰던 때와 영판 다르게 차분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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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프는 자료실에 있으며 조연출이 테이프는 파기하라고 신신당부를 해서 모든 테이프를 파기했는데 단 하나의 테이프만 파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테이프 표지에 중요하다는 표시가 돼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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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실 올라가는 철제문에 머리를 처박았다. 한참을 울었다. 하늘엔 자욱한 별들이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선배가 집까지 태워줬다. 침묵이 차안을 짓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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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얘기는 7년 동안 엄격한 보안 속에서 비밀로 유지됐다. 내가 받은 아픔만큼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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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여린 선배도 상처가 컸는가 보다. 선배도 울었음인지 다음날 얼굴이 퉁퉁 부어있었다. 작년부터 그때의 일을 얘기한다. 나도 이제 웃으면서 지난 일을 얘기할 수 있고 한편으로 그립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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