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가 주는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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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비우고 감각을 되살리는 '걷기'

제주 올레길을 걷는 중인 이용운 씨 ⓒ박재철 CBS PD

[PD저널=박재철 CBS PD] 이용운(51) 씨는 걷기 애호가다. 일과는 새벽 4시 반, 한 시간 걷기로 시작된다. 제약회사 25년 차 직장인인 그에게 걷기는 몸과 마음을 가볍게 하는 주요한 루틴이다.

대한민국은 요즘 걷기, 특히 맨발 걷기 열풍이 한창이다. 걷기의 치유 효과 때문이다. 인류가 가진 특권과 이점인 직립보행이 최근에서야 공인(?)되다니, 격세지감이다.

걷기가 일상인 이들의 특별한 소풍은 역시 제주 올레다. 올레 찬가는 그간 차고 넘쳤다. 첨언은 군더더기일 정도다. 27코스 437km 완주자는 제주 올레 사무국이 주관하는 ‘명예의 전당’에 등재된다. 현재까지 등재자만 2만 명이 넘는다. 직장생활 사이사이 제주를 찾은 이용운 씨도 완주를 앞두고 있다. ‘죽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현대인이 이제 ‘살기’ 위해 걷고 있다. 걷기는 이 시대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제주항에서 뱃길로 1시간, 추자도 올레길을 동행 취재했다. 추자도는 상추자(18-1코스, 11.4km), 하추자(18-2코스, 10.2km)로 길을 연다. 올레길이 본섬 제주에서 확장된 셈이다. 추자도는 비탈이 가파른 기암절벽 산길을 많이 품고 있어 올레길 중 난도가 가장 높은 곳이다.

영화 <나바론 요새>에서 등장하는 에게해 캐로스섬 나바론 절벽 해안에서 이름을 따왔다는 ‘나바론 하늘길’은 추자도의 으뜸 비경으로 손꼽힌다. 홀로 올레길을 걷는 이용운 씨의 발걸음을 조용히 뒤따라가면서 틈틈이 녹음기를 꺼냈다.

제주 '나비론 하늘길' ⓒ박재철 CBS PD

“누구나 그렇겠지요? 연차가 높아질수록 회사의 주요한 의사 결정을 할 위치가 되죠. 산을 오를 때 산소 부족을 겪듯이 그 중압감이 만만치 않습니다. 걷기는 고민을 단순화시켜 줍니다. 걷다보면 불순물이 증류되고 중요한 것들만 남아요. 그 상태에서 맘속으로 중요 결정을 하는 편입니다. 대체적 그 결정에 만족하고요. 걷기는 판단과 선택에 있어 저를 최적의 상태로 만들어 줍니다. 걷다보면 내 안에도 길이 뚫리는 기분입니다.”

등대 전망대에 다다르자 높이가 시야를 선물한다. 접힌 부챗살이 펼쳐지듯 추자도의 자태가 두 눈에 꽉 찬다. 걷기는 뭐니뭐니해도 시각의 쾌감을 선사하는 일이다.

“걷는 과정 중에 보는 즐거움이 제일 크지요. 그런데 저는 되도록 다른 감각들을 열려고 애씁니다. 특히 촉각, 후각, 청각을요. 제주의 바람이 살갗에 닿는 느낌이나 길섶에서 들려오는 이름 모를 새소리, 벌레소리 그리고 코끝을 파고드는 바다내음과 풀내음, 그런 것들은 기억하려고 합니다. 도시생활에는 시각의 기능만 커지는 것 같거든요. TV 화면, 컴퓨터 모니터, 휴대폰…올레에서는 둔화된 다른 감각을 되살려보려 합니다.”

도보에서 자전거, 자동차, 비행기, 이제는 우주선까지, 기술발달로 인한 이동의 가속력은 공간이동을 쉽게 했지만 그에 비례해 몸의 감각은 퇴화시켰다. 점점 ‘듣다’, ‘접하다’, ‘맡다’ 같은 감각 동사의 쓰임새가 줄어든다. 걷기는 그의 말처럼 화석화하는 감각을 복원시키는 하나의 방편이 될는지도 모른다.

이용운 씨 ⓒ박재철 CBS PD

“올레는 자연풍광도 좋지만, 길 중간마다 마을을 들리게끔 해놓았어요. 사람 사는 것도 살펴보고, 음식도 먹고, 숙박도 하지요. 저는 그걸 일상과 ‘단절’하고 걷는 게 아니라 일상 ‘속’에서 걸으라는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일본 규수지역에도 올레길이 만들어졌다는데, 일본인들의 일상은 어떤지 내년에는 그 길도 걸어볼 계획입니다.”

‘길’은 삶의 가장 친근한 은유다. ‘길이 안 보이네’, ‘길을 찾자’, ‘없으면 길을 내야지’, ‘오르막이니 곧 내리막을 만나겠지' 등등…

걷기와 살기, 그 속성에 있어서 둘은 생각보다 넓은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아픈 마음을 달래고 본질에 충실한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이 많아질수록 길 위에 서는 이들 또한 늘어난다. 여행을 떠날 때 불필요한 짐을 덜어 배낭의 하중을 줄이는 노력처럼 마음의 근수를 줄이며 좀 더 가볍고 즐거워지려는 것, 점점 퇴화하는 자신의 감각들을 되살리는 것. 도시생활자 이용운 씨가 걷기를 통해 향유하는 두 가지 기쁨이다.

이용운 씨 ⓒ박재철 CBS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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