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의 아름다운 유언,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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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하게 빛나는 허물어짐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대원미디어 

[PD저널=홍수정 영화평론가] 반가운 번복. 행복한 배신. 누구에게 하는 말이냐고? '미야자키 하야오'. 은퇴의 말을 어기고 우리 곁에 돌아온 애니메이션계의 거장. 아니, 이제는 하나의 세계가 되어버린 이름에 대한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반긴다 한들, 그 번복이 가벼이 이뤄졌을 리 만무하다. 오랜 시간 끝에 돌아온 그가 마지막 작품으로 전하고픈 마음은 무엇일까. 감히 짐작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것 하나만큼은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아름다운 유언이라고.

지브리가 늘 그랬듯, 이번 작품도 여러 갈래로 읽힌다. 영화를 본 당신은 아마도 다양한 이야기를 떠올릴 것이다. 여기서부터는 스포일링이 등장하니 유의해 읽어주길 바란다.

먼저 한 사춘기 소년의 복잡한 내면에 대한 얘기로 읽힌다. 주인공 마히토는 어머니를 여의고 나츠코라는 여성을 새어머니로 맞이한다. 그녀를 대하는 감정은 복합적이다. 관심, 어색함, (어머니를 대체한 존재에 대한) 거부감, (새로운 여성을 앞에 둔 소년이 느낄 법한) 이성적인 긴장감, 이런 감정에 대한 죄책감. 여러 갈래의 마음을 정리하고 그녀를 엄마로 받아들이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 마히토가 본격적으로 탑을 탐험하는 시기가 머리를 다친 이후라는 점, 나츠코와 함께하는 결말 등이 이런 해석과 잘 어울린다. 프로이트는 지겹지만 강력하다.

지금 현실에 대한 우화로도 보인다. 모든 것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며 번식하는 작당들과, 그에 맞서 아름다운 가치를 수호하는 자들. 세력 키우기에 집중하는 이들에 맞서, 순수를 지키는 사람들의 싸움으로도 보이는 것이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대원미디어 

하지만 내게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이별을 준비하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마지막 한마디다. 어째서냐고? 지금부터 하는 말은 어느 한 평론가의 해석에 불과하니, '영화를 이렇게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가볍게 읽어주면 기쁘겠다.

영화에 등장하는 신비로운 탑과, 탑의 주인 '큰할아버지'는 즉각적으로 무언가를 연상시킨다. 지브리라는 거대한 세계와, 그곳의 창조주 미야자키 하야오. 이 세계를 축조하는 힘은 신비로운 돌에서 나온다. 그 돌은 모든 색이 뒤섞인 검은색을 띤다. 모든 아이디어가 뒤섞인 '영감'을 시각화한다면 이와 유사하지 않을까. 큰할아버지가 탑을 지킬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어느 노령의 예술가도 그렇다. 큰할아버지는 끝을 예감하고 후계자를 찾는다. 하지만 그의 피를 물려받은 이들은 적시에 오지 못했다. 소년은 너무 늦었고, 잉태된 아이는 태어나기 전이다. 그 사이 탑은 불손한 세력들에 잠식되어 간다. 신성한 임무를 이해하지 못하고, 대충 흉내만 내는 자들에 의해. 혹시 이것은 미야자키 하야오가 느끼는 지브리의 현실일까.

결국 탑은 무너진다. 이 부분에 이르러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일생을 비유한 작품에서 이런 결말을 쓴다고? 그건 마치 "나의 시간은 이제 끝났다"라고 말하는 거장의 담담한 고백처럼 느껴진다. 큰할아버지는 자손들을 모두 탑 밖으로 내보내고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다. 아오사기가 마히토에게 말한다. 탑에서 무언가 가지고 나왔구나. 그것도 점차 잊힐 거야. 그냥 다 잊으면 돼. 이 영화를 미야자키 하야오와의 대화로 받아들인 관객에게 이 부분은 견디기 힘들다. 영화의 마지막, 조금 성장한 듯한 마히토가 집을 나선다. 그는 과연 탑의 세계를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까.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대원미디어 

주제넘은 추측을 해보자면, 이것이야말로 마지막을 앞둔 미야자키 하야오의 태도일 것이다. 나의 아름다운 세계는 끝났어. 아마도 잠깐 기억되다 사라지겠지. 하지만 괜찮아. 잊어도 돼. 너희는 너희의 세계를 살아가면 되는 거야. 이것이 정말 그의 뜻이라면 나는 받아들이지 못하겠다. 세상에는 잊히지 않는 것들도 있으니. 더구나 이토록 아름다운 유언은 지워내기 어렵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내게 단 하나의 결정적인 장면으로 남았다. 탑이 무너져 내리던 바로 그 장면. 어느 날 문득 우리 곁에 돌아온 미야자키 하야오는 자신의 빛나는 세계를 하나둘 펼쳐 보인 뒤, 기꺼이 모두 허물어 버리고서 홀연히 떠나갔다. 이토록 찬란하게 빛나는 허물어짐을 나는 근래 본 일이 없다. 잊으라 했지만, 잊지 못할 것이다. 끝을 자꾸만 유예하는 것은 나의 어린 마음일 것이다. 이제는 정성스러운 이별의 말에 답을 해야겠다.

안녕, 미야자키 하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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