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 남자', 볼 수 없는 앞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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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큐시트]

영화 '한 남자' 스틸컷
영화 '한 남자' 스틸컷

[PD저널=박재철 CBS PD] 소조의 찰흙을 잡아주는 건 뼈대다. 뼈대는 감춰져 있어 안 보인다. 사실 보이면 안 된다. 예술 작품의 주제는 소조의 뼈대를 닮았다. 완성도가 높을수록 더욱 그렇다. 쉽사리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작품 전체를 떠받치고 있는 것.  

영화 <한 남자>는 히라노 게이치로의 동명소설을 스크린으로 옮긴 작품이다. 소설과 영화 모두, 다수의 수상 이력이 보여주듯 평단으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영화의 표면적 서사는 가짜 신분을 얻어 살아간 ‘한 남자’의 실체를 추적하는 미스터리이다. 그러나 작품은 그 이상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 <한 남자>는 그리 친절하지 않다. 말줄임표 자리에 독자나 관객이 나름의 의미를 써넣기를 조용히 기다린다. 여러 겹의 외피를 두른 이 작품의 뼈대는 무엇일까?  

소설가 히라노 게이치로는 2015년에 철학 에세이 한 권을 출간했다. <나란 무엇인가>. 이 책은 작가의 내면 깊숙이 자리한 오랜 질문 속으로 독자들이 한 계단씩 내려가는 난간이 돼준다. <나란 무엇인가>에서 작가는 ‘분인(分人)’이란 개념어를 만들어  인간이 추구하는 정체성에 대해 탐구한다.

그의 ‘분인’은 개인과 대별된다. 일본인들이 서구에서 들어온 외래어 ‘individual’을 처음 한자로 옮길 때, 왜 개인(個人)이란 말을 선택했을까? ‘individual’은 더 이상 나누지(divide) 못하는(in) 존재를 뜻한다. 즉, 타인과 공유 불가능한, 한 인격의 핵심적 본질을 내포한 개체로 풀이된다. 개인은 국가나 사회를 이루는 최소단위이자 절대적 고유성과 존엄성을 지닌다. 타인과 구별되는 고유하고 개성적인 특성을 가진 자유로운 단독자가 개인이다.

그런데 히라노 게이치로는 이 ‘개인’이 정말 유효한 개념인지 묻는다. 개인의 고유한 특성인 ‘정체성’이 정말 실재하는가? 라며 의문을 던진다. 오히려 인간은 상황에 따라, 관계에 따라, 자신의 여러 모습 중 하나가 선택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적 존재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때 선택된 내 모습이 ‘분인’(dividual)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의 정체, 즉 ‘개인’으로 수렴되지 않는다. ‘낱개’라기보다는 ‘다발’ 형태의 존재양식을 갖는다. 필요에 따라, 환경에 따라 한 묶음의 다발에서 꺼내진 일시적인 인격이 ‘나’일뿐이다. 그러므로 일관되지 않을 수 있고, 때론 모순되거나 평소와 배치되는 내가, 밖으로 외화될 수도 있다. 이는 하나의 정체성 찾기에 골몰할 이유도, 자신의 이중성에 괴로워할 필요도 없다는 뜻으로도 읽힌다. 여기서 반론이 가능하다. 

히라노 게이치로가 쓴 철학 에세이 '나란 무엇인가'
히라노 게이치로가 쓴 철학 에세이 '나란 무엇인가'

“이렇게 되면 타인과 다른, 나만의 특성은 무의미한 것인가?”  
“사회적 관계란 결국 나에게 이로운 ‘가면놀이’일 뿐인가?”    

히라노 게이치로의 대답은 이렇다.   

“‘진정한 나’라는 실체는 없어도 가장 나다운 ‘분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사람들은 그 ‘분인’을 진정한 나라고 믿고 살고 있다. 단순한 생각이지만, 내가 가장 만족하는 상태의 분인이 ‘진정한 나’로서의 분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한 남자>는 시작과 끝을 하나의 그림으로 열고 닫는다. 그림 속에는 뒷모습의 한 남성이 서있다. 그가 대면한 막의 반대편에도 같은 뒷모습이 그려져 있다.화폭 오른편 하단에 책 한권이 반사각으로 그려져 있어 사내가 바라보는 막이 다름 아닌 거울임을 유추케 한다. 거울임에도 그러나 우리는 그의 앞모습을 볼 수 없다. 이 기이한 그림은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금지된 재현>(Not to Be Reproduced, 1937)이다. 
   
얼굴이 누군가의 정체성을 표상한다면, 우리는 그 얼굴을 결코 볼 수 없다는 의미일까. 하나로서의 원본이 없는데 어떻게 재현이 가능하겠냐는 르네 마그리트의 메시지일까, 결국 우리는 ‘개인’이 아닌 ‘분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작가의 관점을 감독이 수용한 영화적 장치일까?  

작품 후반부, 사건을 의뢰한 리에(X의 아내)는 최종 조사 보고서를 앞에 두고 변호사 키토에게 이런 말을 건넨다.   

“이렇게 알게 되고 나니 하는 말이겠지만, 꼭 진상을 알 필요가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 마을에서 그를 만나고 좋아하게 돼서 가족이 되고, 하나(딸)가 태어나고... 그건 흔들리지 않는 사실이니까요.”   

베일에 싸여있던 X는 ‘살인자의 자식’이라는 주홍글씨를 떼고 새로운 사람으로 살고자 가짜 다이스케로 신분을 위장했다. 그 사실이, 3년 9개월을 함께 한 리에와의 삶을 가짜로 만들 수 있을까? 이를 밝혀낸 변호사 키토는 가정적으로 사회적으로 안정돼 보이는 모습과 달리, 재일교포 ‘조센징’이라는 차별적 시선 때문에 괴로워하는 인물이다.

‘살인자의 자식’과 ‘조센징’라는 강력한 편견의 레테르는 한 사회가 그들을 규정하는 주요한 정체성으로 작용한다. 이 규정력은 거스를 수 없는 숙명인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태생적으로 부과된 관습적 징표가 한 사람에 대해 도대체 무엇을 말해 줄 수 있을까? 무엇보다, 한 사람이 온전한 삶을 살아가는데 얼마나 유효한 기준이 될 수 있는가? 

‘분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한 남자>는 히라노 게이치로가 <나란 무엇인가>에서 보여준 철학적 시선의 테두리를 넘어, 차별과 배제, 낙인과 혐오라는 사회 문제의 맥락으로까지 그 해석의 동심원을 넓혀간 작품으로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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