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되는 따뜻한 겨울, 기모 옷 꺼낼 날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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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어로도 악당도 없는 세상 19]

포근한 겨울 날씨를 보인 지난 8일 오후 서울 반포 한강공원에서 한 시민이 반팔 차림으로 산책하고 있다. ©뉴시스
포근한 겨울 날씨를 보인 지난 8일 오후 서울 반포 한강공원에서 한 시민이 반팔 차림으로 산책하고 있다. ©뉴시스

[PD저널=박정욱 MBC PD] 2023년 여름 북극은 기상관측 사상 가장 기온이 높았다고 한다. 올해 북극의 7∼9월 평균 기온은 6.4도였다. 1900년 기상관측을 시작한 이래 최고 기온이다. 북극만 더운 게 아니었다. 지난여름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계 곳곳이 불볕더위로 큰 고생을 했다. 특히 유럽은 최악의 폭염에 시달렸다. 남부 유럽은 40도를 웃도는 날씨로 많은 인명 피해를 낳았다.

하지만 나는 솔직히 별로 날이 더운 걸 못 느끼고 살았다. 더위를 이기지 못해 이탈리아 로마의 광장 분수대에 뛰어드는 사람들의 모습을 사무실이나 스튜디오의 TV 화면으로 보면서 에어컨의 호사를 누린 덕분에 여름을 그럭저럭 잘 넘길 수 있었다. 물론 가끔 마음 한구석에 불안감이 찾아오긴 했다. 이렇게 냉방 시스템으로 소비해버린 연료가 또다시 원귀처럼 지구에 들러붙어 다른 계절에 나를 괴롭히겠거니 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올 겨울이 심상치 않다. 나이가 좀 드니 엄살이 심해져서 겨울이 시작될 무렵 평생 입지 않던 기모 외출복을 샀다. 내 뱃살을 가려줘서 마음에 드는 옷이다. 하지만 딱 하루 입고는 더이상 입지 못했다. 기모 상의에 두툼한 패딩 점퍼까지 입었더니 너무 더워서 온몸이 땀범벅이 된 탓이다. 패딩 점퍼를 포기하지는 못하고 결국 기모를 장롱 속에 넣어두었다. 

겨울이 따뜻하다. 지난 여름부터 계속되어 온 엘니뇨 현상 덕분이란다. 올해 중국은 62년만에 가장 따뜻한 가을을 맞았고 일본은 20세기 이후 가장 기온이 높은 11월을 보냈다. 12월 들어서도 북반구 곳곳에서 따뜻한 날씨가 계속된다. 뉴욕도 서울도 베이징도 예년에 비해 따뜻하다. 겨울이 따뜻하니 난방비가 절약된다. 세계적인 인플레이션에 한몫 거들던 국제유가가 떨어졌다. 천연가스도 하향세다. 덕분에 계속 오르던 물가가 좀 안정될 기미를 보인다. 선거를 코 앞에 둔 국가의 지도자들은 한숨 돌릴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세상사엔 늘 양면이 있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는 법이다. 엘니뇨는 최소한 내년 3월까지 영향을 미칠 거라는데 전세계적으로 가뭄이 들어 농작물에 피해를 줄 가능성이 높다. 이미 지난 여름부터 시작된 엘니뇨 탓에 인도와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나오는 쌀과 원두, 설탕, 팜유와 식용유 등의 가격이 한동안 강세를 보였다. 유가가 안정을 찾으면서 최근 들어 국제 식량 가격도 안정을 찾았다고는 하지만 난방비 적게 든다고 기뻐하다 보면 어느 틈엔가 마냥 올라버린 식자재 가격에 다시 한숨 짓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올해 슈퍼 엘리뇨의 영향으로 수확이 줄면서 국제 카카오 가격이 44년 만에 최고 수준으로 치솟았다. 12월 인도분 카카오 가격은 뉴욕선물거래소에서 톤당 3,786달러까지 치솟아 1979년 1월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사진은 지난 10월 29일 서울 시내 대형마트에 진열된 초콜릿.©뉴시스
올해 슈퍼 엘리뇨의 영향으로 수확이 줄면서 국제 카카오 가격이 44년 만에 최고 수준으로 치솟았다. 12월 인도분 카카오 가격은 뉴욕선물거래소에서 톤당 3,786달러까지 치솟아 1979년 1월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사진은 지난 10월 29일 서울 시내 대형마트에 진열된 초콜릿.©뉴시스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서울 태생인 나는 매년 한강이 얼어붙는 걸 보면서 자랐다. 겨울이 되면 한강변 얼음판은 스케이트장으로 변신했다. 스케이트를 능숙하게 타지는 못했지만 스케이트장 옆에서 파는 오뎅을 먹는 재미에 종종 타러 다녔다. 물론 요즘 한강이 잘 얼지 않는 게 단순히 지구온난화로 인한 이상기후 때문만은 아니다. 공사로 수심이 깊어지고 물살이 빨라진 것도 주요 원인이다. 그렇지만 겨울은 춥고 여름은 더웠던 기억이 자꾸 흔들린다. 지구가 뭔가 달라지고 있는 중인 건가.

그런데 지구는 과연 넓은가보다. 북반구 반대편인 유럽에서는 지금 폭설과 혹한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영국과 독일, 네덜란드, 스위스 등지에서 특히 심하다고 한다. 지난 12월 2일 뮌헨의 강설량은 역대 12월 강설량 최고 기록을 갱신했다. 서울에서는 반팔을 입고 돌아다니는 젊은이들이 눈에 띄는 동안 저기 유럽에서는 강추위가 몰아닥친 것이다. 정말 지구가 넓어서 그런 걸까. 아니면 엘니뇨의 심술이 고약한 걸까.

이상기후와 관련해 나의 또다른 두려움은 몇년 사이 흔하게 목격되는 초대형 산불이다. 엘니뇨는 강수량 부족을 초래한다. 가물면 산불도 잦아진다. 미국과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그리스 등지에서 재난 수준의 산불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지옥이 정말 존재한다면 저런 모습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끔찍한 불구덩이를 외신과 SNS를 통해 보았다. 사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강원도에서 대규모 산불이 언제 일어날 지 모르는 현실 속에 살고 있지 않나.

겨울은 이제 시작이다. 긴 겨울 동안 지금 유럽을 괴롭히는 제트기류가 언제 한반도를 덮칠지 알 수 없다. 폭염도 혹한도 싫다. 다만 뱃살을 커버해 주는 새 기모 상의는 좀 입고 돌아다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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