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기이한 순간 펼친, 올해의 한국영화 ‘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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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괴인' 스틸컷.
영화 '괴인' 스틸컷.

[PD저널=홍수정 영화평론가] 매년 연말에는 '올해의 한국영화/외국영화 베스트' 리스트를 선정한다. 올해도 어김없이 리스트를 정리했다. 하지만 한국영화는 꼽지 않았다. 그 이유는 '베스트'라고 이름 붙이기 민망할 정도로 좋은 작품이 적기도 했지만, 하나의 작품이 발군으로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가 쓴 '올해의 한국영화 베스트' 리스트에는 단 하나의 작품만 오른 셈이다. 바로 영화 <괴인>이다. 

올 11월 우리를 찾아온 이 작품은 제목만큼이나 기이하다. 이정홍 감독의 첫 단독 장편 연출작이고, 비전문배우인 박기홍, 안주민, 이기쁨, 전길이 주연을 맡았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사실 줄거리라 부를 수 있을지도 의심이 든다. 목수 기홍(박기홍)은 한 피아노 학원을 시공한다. 그 과정에서 학원의 여자 선생님에게 관심을 둔다. 어느 날 기홍은 학원 앞에 주차해 둔 자신의 차 지붕이 내려앉은 사실을 발견한다. 누군가 차 위로 뛰어내린 것이다. 범인을 잡기 위해 피아노 선생님에게 따져 묻지만 뾰족한 답이 없다. 기홍은 세 들어 사는 집의 주인 정환(안주민)과 함께 범인을 찾아 나선다. 

사실 차 위로 뛰어내린 범인을 찾는 과정은 영화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범인은 싱겁게 잡힌다. 이 과정은 범인 색출에 참여하는 집 주인 정환의 태도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굳이 해야 할 필요는 없지만 궁금해서, 심심해서, 거기 몰두하다 보니 어느새 중요한 일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한다. 

'범인을 찾는 과정'은 영화를 인도하는 오솔길 같기도 하다. 영화는 그 길을 따라 자박자박 걸으며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면서 주변에 놓인 풍경을 관찰하기도 하고, 샛길로 새기도 하고, 길가의 꽃 냄새를 맡거나, 길옆에 놓인 자갈을 발로 툭툭 건드린다. 그런 딴청과 몰입, 퍽 진지하면서도 다분히 유희적인 시간이 <괴인>을 가득 채운다. 

그런 와중에 영화는 일상에 틈입한 괴이한 순간들에 자주 시선을 빼앗긴다. 영화 초반, 압도적인 장면이 나온다. 기홍은 시공하는 피아노 학원의 선생님에게 간단한 연주를 부탁한다. 아저씨들의 짓궂은 말에 못 이기듯 연주가 시작된다. 그런데 느릿한 선율이 지속되며 이곳의 공기가 서서히 달라진다. 공사장도, 공연장도, 학원도 아닌 이상한 공간. 즐겁지도 우울하지도 않은 연주. 잠깐 사이에 이곳에 피어난 단 하나의 시공간. 이 장면은 <괴인>이 포착하려는 일상의 기이한 순간을 단칼에 잡아내며 영화의 저력을 보여준다. 

영화 '괴인' 스틸컷.
영화 '괴인' 스틸컷.

이후에도 잊을만하면 자꾸만 이상한 장면들이 튀어나온다. 친구에게 목수로서 수입을 자랑하는 기홍, 기홍에게 집의 구조를 설명하는 정환, 오묘한 미소를 지으며 술자리를 함께하는 현정(전길), 해맑은 건지, 생각이 없는 건지, 순진한 건지, 슬픈 건지 알 수 없는 하나(이기쁨). 여기에는 일상에 때때로 찾아오는 낯선 순간들이 산적해 있다. 분명 나의 삶에도 찾아온 적 있는 그 낯설고 두려운 순간. 그러나 조금만 지나면 깃털처럼 날아가 기억에 남지 않는 순간. 이정홍은 그런 시간을 스크린에 꽝꽝 박아둔다. 그래서 영화가 분명 우리 곁에 있는 일상적인 풍경을 찍고 있음에도, 자꾸만 꿈을 꾸는 듯한 비현실적인 느낌이 든다. 

'괴이하다', '이상하다'는 말만 중얼거리게 하는 낯설고도 낯익은 풍경. 영화 <괴인>은 그것을 우리 앞에 펼쳐놓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반대로 필자인 나는 패배감을 느낀다. 여기에는 '영화를 언어로 표현해야' 하는 내가 언어화하지 못하는 장면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그 장면을 말로 설명할 수 있어도 거기서 뿜어나오는 기이한 감상까지 언어화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이 실패는 짜릿하다. 역설적이게도 언어화하지 못하는 영화야말로 평자에게 진한 즐거움과 도전의식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현대적인 공간, 동시대적인 시간을 배경으로 일상에서 마주칠 법한 기묘한 순간을 길게 펼쳐, 우리를 생소한 저곳으로 데려가는 영화 <괴인>은 말할 것도 없이 2023년의 한국영화다. 호들갑이 될 것을 감수하고 말하자면, 이정홍 감독은 홍상수·박찬욱·봉준호를 잇는 한국의 거장으로 성장할 재목이다. 그러니 한 해가 저물어가는 이때, 2023년 한국영화계가 남긴 단 하나의 족적을 찾는 이에게 <괴인>을 주목하라고 말하고 싶다. 다시 도전할 시간이다. <괴인>을 보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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