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살리는 다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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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큐시트]

오는 10일 방송 예정인 CBS 주말뉴스쇼에 출연한 백수린 작가.
오는 10일 방송 예정인 CBS 주말뉴스쇼에 출연한 백수린 작가(오른쪽).

[PD저널=박재철 CBS PD] 다정(多情)은 사람을 움직일 수 있을까? 백수린의 소설을 읽다 보면 ‘다정’은 그럴 힘이 충분해 보인다. 소설 속 우두커니 서 있는 캐릭터를 움직이게 하는 태엽 열쇠는 다정이다. 마지막 책장을 덮은 독자는, 해바라기가 그러하듯 다정이 내뿜는 햇살 쪽으로 자신의 마음을 서서히 옮긴다. 백수린은 다정의 에너지를 믿는 작가다. ‘잠 못 들게 하는 병’이나 절제력을 잃은 감정 낭비가 아니다. 그에게 다정은 생기를 잃은 사람들을 살려내는 힘의 원천이다. 

첫 장편 <눈부신 안부>의 독후감은 다시금 ‘다정’이다. 해미의 감당키 어려운 슬픔과 비애를 조용히 어루만져 준 것도 이모의 다정이었고, 철갑을 두른 그의 마음을 하나둘 풀어주고 거짓말에 기꺼이 속아 넘어가 준 것 역시 선자 이모의 다정이었다. 낯선 독일 땅, 외톨이 해미를 공동체의 원 안으로 끌어 당겨준 것은 레나의 다정이었으며, 더디기만 한 해미의 시계 시침에 관계 회복의 시간을 맞춰준 것 또한 우재의 다정이었다. 그가 생각하는 다정이란 무엇일까?

“‘다정하다’는 ‘친절하다’, ‘상냥하다’ 하고는 좀 다른 것 같아요. 저는 다정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마음을 다한다’ ‘정성을 다한다’ 이런 이미지가 떠올라요. 무엇을 다한다는 건 빨리, 혹은 한두 번 하는 게 아니라 천천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다정에는 시간 개념이 들어가 있어요. 우리가 다정하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오래 바라보고, 또 지극히 수고와 정성을 다하죠. 다정은 다른 사람을 공감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도 마찬가지로 나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서도 중요한 삶의 태도가 아닌가 싶어요.”

소설은 실패한 자, 붕괴한 자, 잃어버린 자, 그리고 조용히 우는 자들의 공간이다. 서사는 그들의 불행과 상처, 갈등과 시련을 화석 연료 삼아 앞으로 나간다. <눈부신 안부>의 화자인 해미 역시, 가스 폭발로 언니를 잃은 슬픔을 안고 산다. 언니의 삶을 대신 산다는 부채감은 어린 해미의 영혼에 무거운 납덩어리 하나를 달아 놓는다. 모든 작가는 소설 속 인물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통과한다. 소설을 쓰면서 그 깊은 상처와 슬픔이 어떤 식으로 치유되길 바랐을까? 
 
“슬픔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에게는 다른 사람들의 조력이 꼭 필요해요. 물론 당사자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병행돼야 한 사람의 상처를 온전히 치유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제 소설에는 선한 인물들이 유독 많이 등장해요. ‘요즘 세상에 착한 사람들이 어딨어? 말이 돼? 판타지 아니야?’ 이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지 싶어요. 그런데 한 사람의 구원은 바깥으로부터 다수의 선한 노력이 있을 때만 가능한 게 아닌가 해요.”

오는 10일 방송 예정인 CBS 주말뉴스쇼에 출연한 백수린 작가(오른쪽).
오는 10일 방송 예정인 CBS 주말뉴스쇼에 출연한 백수린 작가(오른쪽).

한 방울의 진한 잉크를 희석하기 위해서는 많은 양의 물이 필요하다는 뜻일까? 한 사람의 슬픔을 치유하고 애도하는 일도 이럴진대, 연이은 대형 참사로 집단적 슬픔이 눈 덩어리처럼 응어리지고 단단히 뭉쳐진 곳이 지금 여기 우리의 삶터다. 운동화 끈이 풀렸는데 앉아서 다시 묶는 게 아니라 풀린 채로 우린 어딘가로 계속해 뛰어간다. 충분한 애도는커녕 당사자들은 자신의 슬픔을 드러내는 것조차 꺼리는 분위기다.

“우리는 늘 바쁘고 조바심이 심하죠. 슬픈 상황도 빨리 처리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고 하는 경향이 강해요. 제가 읽은 어느 책에 이런 구절이 있어요. ‘슬픔은 장애물 넘기가 아니다.’ 슬픔의 속성은 극복이 아니라 되돌아옴이래요. 인간은 슬픔을 결코 극복할 수 없어요. 슬픔과 함께 살면서 되돌이표로 다가오는 슬픔과 공존하는 게 삶이래요. 시간이 지나가면 찾아오는 빈도가 차츰 낮아질 뿐이죠. 그런 인식이 있으면 우린, 슬픔에 대해 좀 더 너그러워질 수 있지 않을까요. 슬픔을 극복하지 못한다고 자책하는 나에게도 그리고 그런 슬픔 속에서 침잠하는 타인에게도.” 

백수린의 소설은 “소리 없이 울다 간 사람”(곽효환)을 조용히 찾아가 다정히 안아주는 순간들을 담고 있다. 그의 산문집 <다정한 매일 매일>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은 어떤 힘일까? 내게 소설 쓰는 일은 누군가에게 건넬 투박하지만 향기로운 빵의 반죽을 빚은 후 그것이 부풀어 오르기를 기다리는 일과 닮은 것 같다.” 

고등학교 때부터 제빵을 시작했다는 작가 백수린. 슬픈 이에게 건네는 “별것 아니지만 도움이 되는”(레이먼드 카버) 빵 한 조각이, 다름 아닌 소설의 존재 이유는 아닌지 넌지시 묻는다. 아마도 ‘다정’은 그의 빵 반죽을 먹음직스럽게 부풀어 오르게 하는 한 스푼의 이스트이진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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