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가 떠난 뒤 남아있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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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필독도서 78] ‘뒷자리: 어떤 일을 한 뒤의 흔적’

지난 17일 서울광장 분향소 앞에서 10.29 이태원참사 유가족 협의회와 시민대책회의가 '참사 외면, 거부권남발 규탄' 윤석열 정권 심판 159개 보라색 풍선 행진에 앞서 플래카드를 들고 있다. ©뉴시스
지난 17일 서울광장 분향소 앞에서 10.29 이태원참사 유가족 협의회와 시민대책회의가 '참사 외면, 거부권남발 규탄' 윤석열 정권 심판 159개 보라색 풍선 행진에 앞서 플래카드를 들고 있다. ©뉴시스

[PD저널=오학준 SBS PD] “하루면 될 줄 알았던 74일 파업의 시작이었다.” 싸움은 점이 아니다. 아무리 작은 싸움도 길이를 가진다. 싸움이 일어날 것 같은 조짐, 불안감에 함께 모이는 사람들, 싸움을 막기 위한 목소리와 끝내 터지고 마는 싸움의 순간들, 수습을 위해 애쓰는 이들과 조용히 잊히길 바라는 자들의 줄다리기, 스치듯 지나가는 카메라와 그 이후로 길게 이어지는 남은 자들의 삶이 저마다의 길이로 싸움의 시간 위에 줄지어 있다. 

카메라는 싸움의 아주 짧은 순간을 발췌해 이곳에 싸움이 있다고 사람들을 향해 떠든다. 세상은 매일 새로운 싸움이 일어나고, 사람들은 쉽게 흥미를 잃는다. 싸움을 기록으로 남겨 두었다는 말로 자책인지 자위인지 모를 말을 남기고, 카메라는 새로운 싸움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그곳에 사람들의 관심을 끌 자극적인 요소들이 무엇인가 남아 있기를 기대하면서. 실제로 남는 건 지워진 사람들일 뿐임에도 불구하고. 

저널리스트 김인정이 <고통 구경하는 사회>에서 지적한 것처럼, 고통도 익숙하면 문화가 된다. 해결이 어려운 사건일수록, 그래서 반복되는 고통일수록 사람들은 관심을 보여주는 데 인색해진다. 고통을 증명하기 위해 당사자들은 몸을 내던지고, 울부짖어야 하고, 그제야 카메라는 짧게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이내 다시 사라진다. 관심은 점으로만 남는다. 여전히 그곳에 사람이 있고, 싸움과 삶은 이어지고 있음에도 ‘과거’라 부르는 뻔뻔함은 쉽게 교정되지 않는다.

싸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써 온 기록노동자 희정은 <뒷자리: 어떤 일을 한 뒤의 흔적>(이하 <뒷자리>)에서 싸움 이후에 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았다. “싸움이 끝났다고 여겨지는 그 순간, 자리를 뜨”던 사람이었던 그는, 끝내 마음에 걸려 싸움을 삶의 일부로 끌어안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했다. 밀양, 화성, 경주와 같은 잊힌 장소들과 롯데호텔, 용화여고, 한국통신과 같이 지워진 사람들의 오늘을 담았다. 

싸움은 많은 것을 바꾼다. 한 때는 하나였던 사람들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감정의 골을 만들기도 한다. 물리적인 다툼이나 소송으로 서로에게 신체적, 경제적 타격을 입히기도 한다. 누군가는 잔인한 매체의 관심을 붙잡기 위해 자기 몸과 삶을 희생양으로 내던진 경우도 있고, 살아남은 사람들도 싸웠다는 이유로 ‘운동권’이나 ‘빨갱이’ 같은 비난에 시달리기도 했다. 배신과 모욕에 삶의 태도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경우도 있고, 망가진 터전을 무기력하게 바라보며 살아야 하는 이들도 있다. 그가 찾아간 모든 곳에 비슷한 풍경이 있었다. 깨지고, 흩어진 후에 어떻게든 수습해서 오늘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황망함이 남아 있었다.

투사로 태어난 사람들은 없다. 돈 몇 푼 받고 평생 살아온 곳, 평생 일한 곳에서 미련 없이 떠날 수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싸웠다. 승리의 예감이 있어서 싸움을 시작한 게 아니라 싸울 수밖에 없어서 싸우기 시작했다. 싸움이 길어지면서 애초에 꿈꿨던 행복한 미래가 꿈처럼 사라지고, 싸움 이전의 삶으로 되돌릴 수 없다는 깨달음에 탄식하고 좌절하기도 했다. 싸우고 싶어 싸운 게 아니었으므로, 떠나는 동료들에게도 모질 수 없었다. 

'뒷자리: 어떤 일을 한 뒤의 흔적' 표지 사진.
'뒷자리: 어떤 일을 한 뒤의 흔적' 표지 사진.

저자가 싸움의 뒷자리에서 발견한 것은 그 고통스러운 상처들에도 불구하고 싸움을 그만두지 않은 사람들의 삶이었다. 파업도, 시위도 어느 날엔 끝이 나기 마련이다. 오로지 싸움 일변도로 버틴다면 끝은 금세 온다. 거대한 권력에 맞서 싸워야 하는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그들보다 우리가 더 빨리 싸움의 끝을 기대하게 되는 상황이지 않은가? 싸움을 오래 지속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싸움의 강도를 조금 낮추는 대신에 싸움의 여파가 오래갈 수 있는 방법을 알았다. 누군가는 그것을 싸움의 ‘소멸’이라고 말하지만 싸움의 여파로 함께 싸운 사람들의 마음이 너울댄다면, 그래서 싸움이 점에서 선으로,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으로 이루어진 면으로 넓어진다면 싸움은 끝나지 않는 것이다.

“사실 싸움이 있던 곳의 사람들에겐 그게 이긴 싸움이건 진 싸움이건, 그 뒤의 과정들이 여전히 남아 있는 거잖아요. (중략) 잊지 말라는 의미라기보다, 싸웠고 송전탑은 세워졌지만, 여전히 그 공간 안에는 그 송전탑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에요.” 

싸움은 사람들의 마음과 시선을 바꾼다. 한때는 자기 자신의 이익에 몰두하던 사람들도 자기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알아보기 시작한다. 송전탑과 원자력 발전소가 들어선 마을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누군가는 편리하게 전기를 사용하는 일이 타인의 목숨을 담보로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만연한 직장 내 성희롱에 항의한 여성 노동자들의 목소리로 ‘모르고 살 권리’를 빼앗긴 이들 가운데 누군가는, 자신의 무지에 몸서리치고 그들과 함께 하기로 나선다. 싸움에서 승리하든 패배하든, 그 사이에서 누군가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달라진다.

“긴 답보 상태에서 한 환경운동 활동가가 하는 말을 들었다. 저들은 지금 우리에게 무력감을 학습시키는 거라고. 너희들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이 무의미한 일을 반복하는 거라고. 그 무력한 마음이 쌓여 내일 나오는 사람이 한 명 줄고 두 명 줄고, 이런 일을 기다리는 거라고.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내일도 나오고, 모레도 나오는 거라고.”

싸움이 벌어지면 자기 세력의 홍보 기회로만 삼는 사람들과, 돈이면 다 된다고 믿는 사람들의 지옥도 한가운데에서 다른 선택을 고민하는 사람들은 태어난다. 폐허만 남은 것 같은 싸움의 뒷자리에서, 내일을 다시 도모하는 사람들이 있다. 잊으면 안 될 삶이 거기 있으므로 카메라는 그곳에 있어야 한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으나, 카메라를 돌려 포착해야 할 싸움의 장소들은 어디에나 있다. 마약이나 주먹다짐에 가려져 잊히는 싸움들이 너무나 많다. 이태원에, 진도 앞바다에, 지하철에, 여전히 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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