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방송비평]대법원장 이용훈과 김병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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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부 독립에 대한 단상

|contsmark0|지난주 이용훈 대법원장이 두산 비자금사건 판결을 비판한 것을 두고 법관의 독립성을 해쳤다는 논란이 일었다. 언론은 “할 말을 했다”는 지적도 있지만 “이 대법원장이 판결을 공개비판해서 파문을 불러왔다”고 주장했다. 우리 역사에는 이용훈과 같은 대법원장이 또 있었다. 초대 대법원장 가인 김병로 선생이 그런 인물이다. 서울대 법대 최종고 교수가 지난 1980년 월간잡지 뿌리깊은나무 8월호에 게재한 김병로 대법원장에 대한 글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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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로는 1887년 12월 15일 전북 순창군 복흥면 하리에서 사간원 관리였던 김상희의 세 자식 가운데 외아들로 태어났다. 친척들의 권유로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목포로 가 처음 영어를 배우고, 스물네 살 때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대학 법과에 입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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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해서는 1914년 경성법전의 전신인 경성전수학교에서 친족 상속법, 국제법, 형법 등을 강의하고 고려대 전신인 보성법률상업학교에서 민법 총칙, 어음법 등을 가르쳤다. 김병로는 조선 사람으로는 다섯 번째로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원 판사로 임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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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제국주의 일본 밑에서 판사라는 것이 어쩐지 마음에 걸려 곧 그만두고 변호사업을 시작했다. 28살의 청년 변호사로서 그는 권세를 얻으려거나 재산을 모으려는 것이 아니라 압박받는 동포의 억울한 처지를 변호해 주려는 뜻으로 가득 차 있었다. 독립운동 단체였던 대동단 사건을 포함하여 3.1운동의 물결로 생긴 많은 사성사건들의 뒷바라지를 모두 맡다시피 했다. 소작쟁의나 노동쟁의, 학생 동맹휴학이나 애국운동들을 뒤에서 몰래 도우려고 북풍회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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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3월에 조직된 신간회에서 회계를 맡았다. 1930년 11월 신간회 전체회의에서 중앙집행위원장에 뽑혔다. 좌우익 대립으로 신간회가 해산되기 까지 신간회를 지탱하기 위해 끝까지 힘을 다해 애쓴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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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회도 해체되고 일본의 대륙 침략이 노골화된 만주사변이 터지자 1936년에 서울 변두리인 창동으로 숨어 들어가 살며 농사와 양계로 나날을 보냈다. 해방이 되자 김병로는 서울로 올라와 1948년 초대 정부의 대법원장으로 사법부의 독립을 지키는 어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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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한복에 두루마기를 입은, 작고 깡말라서 마치 간디를 떠올리게 했던 그는 사법부의 독립과 권위를 세우기 위해 고심했다. 그는 이 나라 역사에서 처음으로 시작하는 사법부의 독립성이 정치적인 전횡으로부터 자유로와야 된다고 믿고 이를 위해 스스로 투쟁했다. 이승만의 독재 위협에 맞서 사법부의 대표로 의연히 맞섰던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그는 폭군적인 집권자가 형식적으로 법에 따른 행동인 것처럼 꾸미는 짓거리를 통탄하면서 이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법부의 독립뿐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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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섭씨 영하 5도 이하로 내려가지 않으면 난방을 하지 말라고 명령하는 바람에 당시 판사들은 집무실에서 군복 점퍼를 입고 얼어붙은 잉크병을 숯불에 녹여 사무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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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중에 아내가 담양의 친정에서 인민군에게 살해됐는데도 피난 수도인 부산에서 그 소식을 듣고도 장례마저도 처가의 몇몇 사람에게 맡겨 버렸다. 이후 아내의 무덤을 옮길때도 “사사로운 일 때문에 순경들에게까지 폐를 끼칠 수 없다”고 장지까지 따라오는 경찰을 돌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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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정권의 반민특위 해체를 비판하고, 사사오입 개헌이 불법임을 역설하고, 정권 연장을 위한 보안법 개악에 반대하는 등 그는 이승만 정권의 반민주적 행태에 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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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식으로 해석하면 가인 김병로는 삼권분립의 현대 정치체제에서 사법부의 수장이 사법부를 넘어 입법부의 법안 개악과 행정부의 통치행위까지 비판한 망나니라고 불러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김병로를 이 나라의 사법의 틀과 뼈대를 놓은 어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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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이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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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병로와 김홍섭> 뿌리깊은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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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8월호 140~1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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