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과 정치의 무한도전 ‘김태호’

정치와 예능, 시너지는 가능한가

TV 예능 프로그램의 전성시대다. 현장 취재를 통해 여론을 일깨우는 활동은 과거엔 주로 기자와 시사교양 PD의 몫이었지만, 예능 PD들도 얼마든지 언론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1987년 민주항쟁으로 표현의 자유가 피어났고, 예능 PD들은 다양성과 창의성을 발휘하여 오늘의 예능 전성시대를 이뤘고, 프로그램을 통해 민주적 여론 형성에 기여할 수 있음을 자각하게 됐다.

정치인들의 모든 행위는 TV 카메라 앞에서 이뤄진다. 선거 개표방송과 ‘대통령과의 대화’ 등 정치 이벤트를 쇼 프로그램처럼 만드는 게 대세다. 정치와 예능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현상은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정치인들의 실제 행동이 TV 속 이미지와 어긋나는 게 일상화되어 정치 냉소주의가 확산될 우려가 있다. 세월호 사건은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새로운 가치관의 문제를 제기했다. 이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의 세상에서 예능과 정치도 더 나은 사회를 위해 힘을 보탤 책임이 있다.

‘정치의 예능화’와 ‘예능의 정치화’, 어떻게 볼 것인가? 새로운 테크놀로지와 치열한 시청률 경쟁 속에서 예능과 정치가 생산적인 시너지를 이룰 전망을 찾아본다. <정치커뮤니케이션의 이론과 실제>(정치커뮤니케이션 학회 발행)에 실린 글을 6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연재 순서]
1. ‘스타 PD’ 삼대(三代) - (1) 송창의 PD ☞기사읽기
2. ‘스타 PD’ 삼대(三代) - (2) 김영희 PD ☞기사읽기
3. ‘스타 PD’ 삼대(三代) - (3) 김태호 PD
4. 정치와 예능의 만남, 그 명암(明暗) - (1) 서수민 PD
5. 정치와 예능의 만남, 그 명암(明暗) - (2) ‘폴리테이너’와 ‘정치예능’
6. 연재를 마치면서 : 정치와 예능, 그 융합의 ‘무한도전’ 

김태호는 마이클 잭슨처럼 여리고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다. “마이클 잭슨은 리듬을 설명할 때 아침 햇살 속에 겨우 몸을 일으키는 느낌에 비유했고, 너무 큰 음향은 주먹을 귀에 쑤셔박는 것 같다고 표현했는데, 이런 그에게 세상 사람들의 막말은 송곳으로 찌르는 상처로 다가왔을 것이다.” (김태호 ; 김혜리 <진심의 탐닉>, 씨네북스, 2010, p.70~p.71) 이 말을 할 때 김 PD는 자기 얘기를 하는 셈이었다. 상처입기 쉬운 그였지만, 동시에 엄청난 열정을 품은 원칙주의자기 때문에 기나긴 파업의 시련을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2012년 파업은 김태호 조합원의 ‘무한도전’이었고, 그것은 PD, 출연자, 시청자 사이에 강력한 유대와 일체감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TV 프로그램은 생물이다. 시청자의 반응을 먹고 진화하며, 수명이 다하면 사라진다. <토요일>의 한 코너 ‘무모한 도전’은 꿈틀꿈틀 자라나서 ‘무리한 도전’이 됐고, 2006년 5월 <무한도전>이란 독립된 프로그램으로 태어났다. 2014년 10월 400회를 기록하는 <무한도전〉은 정박된 배가 아니라 항해중인 배고,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다. 김 PD는 만 8년 넘게 ‘무한도전’ 중이다. 몸이 안 좋아 링거를 맞으며 버텼고, 다른 PD와 교대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고, PD가 적성이 아닌 것 같다는 회의(懷疑)에 시달렸고, 박수칠 때 떠나고 싶다는 바램도 있었다. <무한도전>은 그래도 계속됐다.

<무한도전>은 ‘리얼 버라이어티’라는 예능 트렌드의 원류가 됐다. 자막으로 시청자의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기법은 <무한도전>에서 시작됐다. 다른 어떤 프로그램도 모방할 수 없는 이 프로그램의 특징은 ‘무한도전’ 자체였다. 먼저, 소재와 형식의 무한도전이다. ‘레슬링 특집’, ‘다이어트 특집’, ‘아이스원정대 특집’, ‘벼농사 특집’ ‘갱스 오브 뉴욕’, ‘올림픽대로 듀엣 가요제’ 등 거칠 것 없는 내용을 선보였고, 모든 아이템을 몸에 맞는 새로운 형식에 담아냈다.

유재석 후보는 ‘<무한도전> 방송시간 줄이기 등 시스템 개선’을, 노홍철 후보는 ‘멤버들의 가족과 사생활 공개’를, 정형돈 후보는 ‘시청률 재난본부 설치’를 공약으로 내세워 시청자의 눈길을 끌었다. 유재석 후보를 지지하다가 갑자기 정형돈 지지를 선언한 박명수의 돌출 행동은 철새 정치인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유재석을 떨어뜨리려고 나왔다”는 그의 발언은 지난 대선 토론회에서 가장 강렬했던 장면을 패러디한 것이었다. 그는 선거 때만 작업복을 입고 TV에 나와 친근한 리더의 이미지를 뽐내는 일부 정치인들을 풍자하기도 했다.

대중문화평론가 윤이나는 <무한도전 - 선택 2014>가 단순한 현실 정치 패러디나 풍자가 아니며, 지방선거 홍보를 위한 기획은 더군다나 아니라고 지적했다. “프로그램의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권한을 대중에게 부여한, 예능 프로그램의 차원을 넘어선 도전”(<선거의 훌륭한 교본 ‘무도 선거’>, PD저널, 2014. 5. 27)이라는 것이다. 시청자들은 “평범한 사람이 세상을 바꾼다”는 말에 이끌려 투표에 참여했다. 후보들의 적나라한 생각과 행위를 지켜보았고, 이를 근거로 자신의 한 표를 행사했다. <무한도전>은 현실 정치보다 훨씬 투명하게 선거를 치렀고, 대중은 이 프로그램에 현실 정치를 대입하는 수준을 너머, 바람직한 현실 정치에 대한 소망을 갖기 시작했다. 현실과 닮아있지만 현실 너머 있는 비전을 보여준 <무한도전>의 진지한 시도에 시청자는 ‘유권자다운’ 태도로 화답했다.

TV를 즐겨보고 영향을 받는 사람들은 고학력보다 저학력, 고소득층보다는 저소득층이 많지만, 누구든 동등하게 1인1표를 행사한다. 한 엘리트 정치인의 아들이 ‘미개하다’고 부른 다수 유권자들은 대체로 TV의 메시지를 믿고 수용한다. TV는 이러한 현대 민주주의의 맹점을 부추기고 고착화시킨다. TV가 만들어내는 가상현실은 실제 현실을 닮았지만 결코 일치하지 않는다. 유권자들은 정치인의 행동에 진정성이 있는지, 단순한 쇼에 불과한지 곱씹어 보는 피곤한 과정을 밟아야 하는데, TV는 유권자들의 판단에 별 도움을 주지 않는다.

이미지 정치가 낳는 이러한 부작용에 김태호 PD는 자기 방식으로 경종을 울렸다. <무한도전 - 선택 2014>는 특정 정치인을 풍자하거나 개별 사안에 대한 판단을 돕기보다는, 정치판의 전체 구조를 압축해 보여줌으로써 역설적으로 시청자들이 곧 주권자임을 드러냈다. 시청자들을 프로그램의 주인으로 모시는 특집을 통해 유권자가 곧 정치의 주체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 것이다.

2008년 취임한 이명박 대통령은 <무한도전>의 이용가치를 놓치지 않았다. <무한도전> 제작진이 5월 5일 청와대에서 이 대통령을 만난다는 보도가 나오자 팬들은 격분했고, <무한도전> 시청자 게시판은 “청와대 가지 말아 달라”는 주장이 폭주했다. 장우식씨는 “<무한도전>이 청와대 가면 그 때부터 시청률 0%를 향해 무한도전”이라고 꼬집었다(PD저널, 2008. 4. 24). 10일 방송 예정이던 ‘청와대 특집’은 결국 무산됐고, 청와대 측은 “이 대통령이 순수한 의도로 <무한도전>에 출연하려 했는데 시청자들의 비난이 거세져 이번 일정을 취소했다”고 밝혔다. 김 PD는 “어린이 150명을 상대로 앙케트 조사를 한 결과를 대통령에게 전달해 정책 결정에 도움이 될까 해서 기획했을 뿐 다른 의도는 없었다”고 말했다.

실제 ‘청와대 특집’이 이뤄졌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많은 시청자의 우려처럼 “대운하 · 의보 민영화 · 광우병소 수입 등 민감한 사항들이 눈앞에 있는 시점에서 비굴 모드로 빌빌거리는 모습”(PD저널, 같은 글)을 연출했을까? 이렇게 극단적이진 않겠지만 “끝 모르는 지지율 폭락에 인기 있는 예능 프로로 중생들의 호감을 사려는 정치적 의도”에 어느 정도 이용될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그러나 김 PD는 특유의 균형감과 재기발랄함을 잃지 않았을 거고, 그 결과는 청와대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녹화, 편집, 방송의 전 과정에서 청와대와 <무한도전>의 팽팽한 줄다리기가 벌어졌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김 PD는 정치를 염두에 두고 프로그램을 만들지 않는다는 점에서 송창의 PD로 대표되는 전형적인 예능 PD의 속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필요할 때 주저 없이 정치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김영희 PD의 과감성을 닮았다. 그는 중의적인 표현법으로 풍자와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며 두 선배와 다른, 신세대의 발랄함을 보여주었다. 그는 다른 PD를 비판한 적이 없지만 <러브하우스>를 보며 “어려운 사람의 신분을 노출하고 슬픔을 다시 끄집어내 상처를 보여준 다음 그 ‘대가’로 집을 지어주고 도움을 주는 게 아닌가 하는 불편함”을 느꼈다(김혜리, 같은 책, p.72). 섬세하고 내성적인 그는 “공익도 거품은 빼고 진실을 돋보기처럼 확장해서 보여주는 쪽”을 선호했다. <무한도전>은 송창의 PD와 김영희 PD의 세대가 상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세계를 열었고, 시청자들은 이 ‘도전’의 끝을 예상할 수 없다.

* 이 글은 <정치커뮤니케이션의 이론과 실제>(정치커뮤니케이션 학회 발행)에 실린 글을 발췌하여 엮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