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이 대한민국을 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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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의 세상읽기] KBS ‘추적60분-불평등육아의 경고, 2020 인구절벽’

고백건대 나는 페미니스트이다. 이 얘기를 들었을 때 사람들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고정된 어떤 이미지들에 내가 얼마만큼 부합하는지는 나도 궁금하다. 나를 페미니스트로 키운 건 8할이 우리 엄마다. 젊고 유능했던 20대 중반의 여성이 결혼을 하고, 임신과 출산을 하면서 엄마라는 이름을 얻은 대신 직업과 꿈의 이름을 잃어 버려야만 했던 그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서사가 철이 들면서부터 오랫동안 나를 미안하게 했다.

그리고 나는 그 지극히 평범한 서사가 참으로 신기하게도 세대를 넘어 전수되고 있음을, 할머니에게서 엄마로, 엄마에게서 딸에게로, 그 딸에게서 아직 오지 않은 먼 미래의 딸들에게로 물려지고 있음을 아프게 목격했다. 왜 여전히 우리의 엄마들은 자신의 딸들에게 ‘너는 엄마처럼 살지마’라고 말하고 있는가. 그 평범한 이야기들이 나를 분노케 했고 동시에 두렵게 했다.

이번 방송을 준비하면서 스스로를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많은 엄마들을 만났다. 우리 엄마보다 한 세대 후배인 젊은 엄마들이었다. 어떤 엄마는 둘째 아이를 가지면서 전업맘이 되었고, 어떤 엄마는 출산 이후에 재취업에 성공한 워킹맘이었다.

▲ KBS ‘추적60분-불평등육아의 경고, 2020 인구절벽’ ⓒKBS

전업맘 언니는 ‘너 집에서 애만 보다 보니 이제 감 떨어진 것 같애’라고 얘기하는 남편을 위해 자정이 넘어 맥주 안주로 스팸을 구웠다. 그러면서 아침 6시에 일어나 머리를 감고 뒤꿈치를 들고 아이들 밥을 지었다. 워킹맘 언니는 아무리 바빠도 아침밥을 먹는 아들에게 노래를 불러주었고, 밤이면 밀린 청소와 빨래를 하느라 뛰어다녔다. 그런 언니의 남편은 언제 들어오느냐는 그녀의 말에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언니들의 삶에 남편들은 마치 하숙생 같았고 손님 같았다. 아이를 만들기는 분명 같이 만들었는데 육아는 온전히 언니들에게만 맡겨진 숙명 같았다. 암울하고 믿기 어려운 통계들이 나의 분노와 언니들의 숙명을 증명해주었고 일반화해주었다.

취재가 진행되는 도중에 스웨덴에 살고 있는 한 한국 엄마를 찾게 되었다. 그녀는 전생에 나라를 구했는지 8년 전 우연히 스웨덴 남자와 사랑에 빠져 결혼했고 거기서 8년 째 살고 있다고 했다. 한국에선 강남역에 있는 모 대기업에서 마케팅 업무를 담당했던 그녀는 이제 75% 단축근무를 하며 금요일엔 1시 퇴근을 하는 치과 의료인의 삶을 살고 있었다. 그 동안 그녀의 딸아이는 공공 어린이집에서 아침도 먹고, 야외활동도 하고, 간식도 먹으면서 즐겁게 논다고 했다. 스웨덴에 사니 뭐가 제일 좋으냐는 나의 질문에 하루가 참 길다고, 하루의 시간을 오롯이 내 삶을 사는 것 같다고 말하는 그녀는 심지어 급여도 한국에 있을 때 보다 더 받는다고 귀띔해줬다. 이건 뭔가 잘못 온 것 아닌가 싶었다. 나는 연신 부럽다는 말을 했다.

스웨덴에 출장을 가겠다는 나의 말에 동료들은 또 스웨덴이냐는 반응들을 보였다. 거긴 우리보다 인구도 적고, 땅덩이도 크고, 세금도 많이 걷고, 결정적으로 GDP가 얼마인 줄 아느냐는 라임이 딱 맞는 반응들. 하지만 스웨덴은 30년대까지만 해도 감자나 캐먹으며 사는 가난한 나라였고 당시 450만 명밖에 되지 않던 국민들의 3분의 1은 가난과 실직을 피해 다른 나라로 이민 가던 그런 나라였다. 전쟁을 겪으면서 비로소 조금씩 산업이 부흥했고 서서히 국운이 피어가던 그 와중에도 수출을 주도할 노동력 해소가 가장 큰 이슈였던 그런 나라였다.

그 당시 스웨덴은 인구의 절반인 ‘여성’ 인력에 주목한다. 여자들을 일하게 하려면 어린이집, (의무)육아휴직 제도 등 아이 돌봄과 관련된 정책들이 마련될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스웨덴 여자들은 남자만큼 일도 하면서(물론 거기도 아직 남녀 임금격차, 유리천장 등의 문제들이 있기는 하다) 동시에 엄마의 역할도 완수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됐다. 오늘날 우리가 닮고 싶어 하는 스웨덴의 육아 정책들이 실은 여성-노동과 관련 있다는 사실, 여성 고용률을 높여서 복지 재원 부담을 나누기 위해서라는 사실, 여성들이 남편에게서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기 위해서라는 사실은 그간의 저출산 논의에서 간과돼 왔던 부분들이었다. 스웨덴은 많은 시행착오 끝에 저출산 문제와 여성 노동의 문제가 한 그림을 구성하는 같은 퍼즐 조각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여기서 에피소드 하나. 스웨덴에서 전문가들을 만나며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 전업맘, 전업주부 개념을 설명하는 데 참 애를 먹었다. 여성 고용률이 90%에 육박하는 그 나라에선 모두가 워킹맘이거나 워킹대디이기 때문에 멀쩡한 여성이 비자발적으로 집에만 있게 되는 상황을 쉽게 이해를 못 했기 때문이다. 스웨덴 뿐 아니라 전 세계 선진국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도 여성 고용률이 높을수록 출산율도 증가한다는 사실은 명확했다.

한국의 여성 고용률은 OECD 국가 중 최하위권이다. 놀라운 건 2009년 이후 이미 대학 진학에 있어서는 완전 평등이 이뤄져서 여성이 남성보다 8% 정도 대학 진학률이 높다는 점이다. 그 많던 젊고 유능한 여학생들은 30대가 되면 통계 저 너머로 사라진다. 분노와 두려움에 사로잡혀 결혼을 미루거나 출산을 피하는 여성들이 오히려 똑소리나는 것처럼 보이는 게 지금 우리의 현실이다. 언제까지 여성들에게 아이 낳기를 설득할 것인가, 언제까지 알량한 지원금으로 육아지옥의 포장지를 만들 것인가. 나에게 많은 통찰력을 준 스웨덴의 통계석학 한스 로슬링 교수의 말로 부족한 제작기를 마무리하려고 한다.

“페미니즘이 대한민국을 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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