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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정 PD의 들여다보기]

얼마 전 당산역 주변에 용하다는 철학관을 찾았다. 한때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서 사장까지 했다는 주인은 절반은 내 손금 상담, 절반은 자신이 살아온 인생에 대한 자랑을 섞어가며 ‘손’에 대해 명리학적인 풀이를 해 주었다. ‘아, 이게 아쉽네… 30대 중반까지는 굵직하게 쭉 뻗어 가는데 40 이후에 흐릿해져 선이… 이거 잘못하면 전 재산 다 날릴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돼’, ‘이거 내 손 좀 봐요. 재벌이나 유명 연예인이나 있다는 이 삼지창 손금이 시원하게 쭉 뻗어 있잖아…’ 그러면서 주인장은 20년 전에 먹물을 묻혀 찍어 둔 자신의 손금과 현재의 손금을 비교하여 보여주었다. 주인의 확신에 찬 목소리만큼은 아니었지만 분명 세월의 흐름 따라 그의 손바닥 속 빗금들은 달라져 있었다.

그는 분명히 손금도 변한다고 했다. 심상을 곱게 쓰고 바르게 살면 손바닥 속 숨어있던 산맥이 융기하여 운명선, 감정선, 두뇌선의 굵직한 기존 산줄기를 뚫고 분명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낸다고 말이다. 그러면서 내 손바닥에 자리 잡기 시작한 굳은살들을 가리키며 ‘PD라서 그런지 기계를 많이 만져서 여기가 딱딱하네요, 이러면 좀... 새 선이 생기기 어렵긴 해요…’ 그는 나의 10년 후는 예측하려 하면서도 바로 눈 앞의 굳은살의 이유는 알아맞히지 못했다.

나의 굳은살들은 얼마 전 시작한 클라이밍 탓이다. 볼더링이라고 하는 종목인데 마음이야 스파이더맨이지만 이제 겨우 벽에 붙어 있을 수 있는 수준이다. 보통 클라이밍을 시작하고 가장 먼저 맞닥뜨리는 감각은 발의 통증이다. 일반 운동화보다 훨씬 타이트한 암벽화는 보통 맨발로 신는데 처음의 느낌은 마치 전족 같다. 그렇게 발의 통증에 익숙해지고 나면 그 다음은 손바닥이 아려온다. 암장 벽에 불규칙하게 붙어 있는 알록달록한 홀드들은 대개 그 표면이 거칠거칠한 아스팔트 같은데, 그걸 붙잡고 안 떨어지려고 안간힘을 쓰다보면 손바닥이 다 까진다. 운동 후에 초크와 땀과 탈락된 각질로 범벅된 손을 씻을 때면 꽤 따갑고 아프다.

▲ ⓒpixabay

벽에 매달려 있으면 내 앞에 바로 붙어 있는 홀드 외에는 다른 게 거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하고 많은 발 홀드 중에서도 특별히 작고 기울어져 있으며 디디기 힘든 것들에만 발이 간다. 다른 홀드로 몸을 옮기기 위해선 지금 내 앞의 홀드를 안정적으로 잡고 가는 게 필요한데, 정말이지 무언가를 그렇게 꽉 쥐어 본 건 참으로 오랜만이다. 그렇게 오르고 움직이다보면 지금 내 실력으론 도저히 잡을 수 없는 홀드를 만나기도 한다. 그러면 한 10여초 매달려 있어보다가 심호흡 한 번 하고 매트로 떨어져야 한다. 그렇게 매달림과 떨어짐을 반복하는 사이, 까진 손바닥엔 굳은살이 자리 잡게 된다.

일상에서 수많은 손들을 마주치게 된다. 각자 자신만의 악력으로 스스로의 삶과 세상을 힘껏 움켜쥐고 있는 손들을 말이다. 매일 점심시간이 시작되기 훨씬 전부터 똑같은 곳에서 똑같은 식당 전단지를 나눠주는 아주머니의 손, 쇼핑백 수십 개를 지하철로 배달하는 할아버지의 손, 어딘가로 분주히 발걸음을 옮기는 아기엄마의 하얀 손. 그리고 그 손들에 새겨져 있을 각자의 굳은살을 떠올려 본다.

하루를 버텨야 하는 절실함, 지켜야 하는 무언가를 가진 이의 결의, 손아귀에 너무 꽉 쥔 힘 때문에 종종 지치곤 하는 피로… 그리고 버티고 버티다 힘이 빠져 언제고 한 번은 세상을 움켜쥔 손을 놓아야 할 때의 그 슬픔에 대해 생각한다. 저 아득한 아래에 매트는 있는 건지. 한 번 놓친 손이 영원한 실패나 낙오의 상징이 되고 있는 건 아닌지. 우리 옆의 누군가 힘이 빠져 홀드를 놓칠 때 그이를 잡아보려는 몸짓은 보이고 있는지….

그러다 혹시, 우리가 너무나 많은 손들을 놓쳐버리고 있는 건 아닌지 물어본다. 매트도 없고, 한 번의 놓침이 영원한 추락이 되는, 이 거대하고 무서운 벽을 마주하고, 우리는 그렇게 고독하게 자신만의 클라이밍만 하는 건 아닌지 또 물어본다. 바닷속에서 살려달라고 간절히 붙잡던 아이들의 손을, 컵라면 하나 제대로 챙겨먹지 못한 청년의 손을, 도심 한 복판에서 배가 고파 죽어가던 모녀의 손을…. 우리가 잡았어야만 했던 그러나 놓쳐버린 그 모든 손들을 떠올리며 나는 아리고 따갑고 쓸쓸해진다.

▲ ⓒpixabay

「거기서 알 수 없는 비가 내리지
내려서 적셔 주는 가여운 안식
사랑한다고 너의 손을 잡을 때
열 손가락에 걸리는 존재의 쓸쓸함
거기서 알 수 없는 비가 내리지
내려서 적셔 주는 가여운 평화」 (최승자, 사랑하는 손)

언제고 시인을 만나면 이 시에 대해서 오래도록 얘기를 나눠보리라 마음먹었다. 당신이 사랑하는 손은 어떤 손입니까. 손을 잡아도 여전히 쓸쓸하다면 그게 의미가 있습니까, 라고.

아마도 우리에겐 우리 앞에 붙잡아야 할 홀드 밖에는 다른 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건지도 모른다. 당장 내 삶을 움켜쥐기에도 근력이 달리고, 다리가 휘청하고 한 것인지도 모른다. 다른 이의 손이 쥐고 있는 현실까지 감당하기에 그래, 벅찬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구라도, 언제라도 저 아래로 추락해 버리고 마는 이 잔인하고 아득한 벽 앞에서 그나마 덜 쓸쓸한 일이 한 가지 있다면 우리가 서로의 손을 잡는 것 아닐까. 각자의 손 마디 마디, 손바닥 언덕마다 자리 잡은 굳은살들을 맞대는 것. 그렇게 서로의 쓸쓸함과 고단함을 나누는 것 아닐까. 행여 그 굳은살 때문에 부의 상징인 삼지창 손금 같은 거 영영 안 돋아날지도 모르지만.

언제고 만날 시인이 내게 당신이 사랑하는 손은 어떤 손이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할 것 같다. 단단하게 굳은살이 잡힌, 서로 맞잡은 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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