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실의 아이를 외면해도 괜찮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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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t&책] 어슐러 K. 르 귄 ‘바람의 열 두 방향-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대한민국 군대가 가야할 길은 모병제인가요? 아니면 징병제를 유지하며 문제점을 개선해야 할까요?” 평화주의자들에게 이렇게 난감한 질문이 있을까? 우리는 당연하게도 군대 없는 세상을 꿈꾸지만, 꿈을 핑계로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다. 그즈음 어느 공부모임에서 만난 평화운동가가 우리에게 던진 질문은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기준을 일깨워줬다.

“자유주의자라면 국가가 강제로 개인을 동원하는 징병제를 반대하고 모병제를 주장할 수 있겠죠. 그런데 평화주의자들이 모병제를 지지하는 건 이상하지 않아요? 나만 안 가면 괜찮나요? 누군가는 짊어져야할 사회적인 짐을 소수에게 전가하는 것보단 나누어서 함께 지는 게 평화주의자들의 입장이어야 하지 않나요?”

어슐러 K. 르 귄의 단편소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은 전체를 위한 소수의 희생을 과연 용납할 수 있는가를 질문하는 책이다. 오멜라스는 우리가 꿈꾸는 유토피아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오멜라스의 사람들은 철학적이면서 창의적이다. 그들은 춤과 노래와 축제를 사랑하고, 철학적인 사유와 토론을 즐기며, 부당한 일에 분노할 줄 아는 정의로운 사람들이다. 오멜라스에는 '군주제와 노예제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식 시장이나 광고, 비밀경찰, 폭탄'도 없고 군인이나 성직자도 필요하지 않다.

▲ 어슐러 K. 르 귄 ‘바람의 열 두 방향’ ⓒ시공사

모든 것이 완벽한 오멜라스의 어느 건물에 자그마한 지하실 방이 하나 있다. 창문이 없어 햇볕도 들지 않는 조그만 방은 지하실 특유의 눅눅한 습기와 거미줄 그리고 양동이와 대걸레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그리고 대여섯 살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열 살쯤 된 아이 한 명이 이 지하실 방에 살고 있다. 아이는 옥수수 가루와 기름 반 그릇으로 하루를 버티며 자신의 배설물 위에 앉아 있느라 허벅지와 엉덩이가 늘 짓물러 있다. 오멜라스 사람들은 모두 이 아이의 존재를 알고 있고, 직접 지하실 방에 찾아와 아이를 보고 가기도 한다. 아이를 본 사람들은 충격 받고, 가슴 아파하고, 화를 내거나 분노하거나 무기력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뿐이다. 어느 누구도 아이를 밖으로 데리고 나와 오멜라스의 풍요롭고 고결한 삶을 누리게 해 주지 않는다. 엄중한 계약 때문이다. 아이를 밖으로 데리고 나온다면 오멜라스 사람들이 누리던 온갖 종류의 행복과 풍요와 고결한 삶은 모두 불가능해진다. 고상하게 지은 건축물, 심금을 울리는 음악, 심오한 과학 기술, 오멜라스가 가진 모든 것들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지하실에서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아이가 있어야 하며 오멜라스의 사람들은 그 아이의 존재를 알고 있어야만 한다.

오멜라스 사람들의 위선을 비난하기는 쉽지 않다. 한 사람의 비참한 삶을 대가로 얻는 만인의 행복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조차도, 비참한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만인이 누리고 있는 행복을 모조리 사라지게 만들 결정을 내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오멜라스 사람들을 비판하는 게 쉽지 않은 또 하나 이유는, 오멜라스 사람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전체를 핑계 삼아 소수의 삶을 파괴하는 일은 한국 사회에서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을 읽으면서 사드 배치와 성주를 떠올렸다. 물론 사드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분분하다. 군사적 효용성, 중국과의 관계를 비롯한 외교적인 문제, 그에 따른 경제적 변화, 전자파의 유해성에 대한 논란 등등이 그것이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은 좀 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한국이 오멜라스라면, 성주 군민은 지하실의 아이다. 우리는 오멜라스의 사람들처럼 질문을 받고 있다. 우리의 행복을 위해 성주 군민의 처지를 외면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희생양, 속죄양에 대한 질문에 도덕적인 정답은 없다. 다수를 위해서 소수를 희생시키는 것은 옳지 않지만, 현실에서는 소수를 위해서 다수가 누리는 것을 빼앗기도 쉽지 않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한 답을 평화주의자로서 찾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의 마지막 장면엔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만인이 누리는 행복을 없애버리지도, 지하실의 아이를 외면하지도 못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보다는 좀 더 상황이 좋은 편이다. 오멜라스 사람들이 누리는 행복은 실재로 존재하는 것이지만, 사드가 지켜주는 국가안보는 아까 말했듯이 허상에 가깝다. 우리는 떠나는 대신 너무나 완고한 것에 대해 질문을 던져야 한다. 내가 던지고 싶은 질문들은 이런 거다.

“성주 군민들의 안보를 파괴하는 대가로 우리 모두의 안보를 지켜도 괜찮은 걸까? 아니 그걸 과연 안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누군가의 평화를 파괴하는 방식으로 다른 이들의 안보를 지키는 일을 우리가 용납해야 할까?”

이용석: 병역거부자. 출판사 다닐 때는 노동조합 활동을 했고, 현재는 평화단체 전쟁없는세상에서 활동하고 있다. 효과적인 사회운동 방법을 배우기 위해, 그러면서도 민주주의에 대한 긴장을 놓치지 않기 위해 책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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