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대신 함경북도 출신 서울시민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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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차 통일방송포럼 개최…탈북 대학생들 “‘탈북자’란 단어, 차별로 느껴져”

“탈북자라는 말을 들으면 왠지 ‘북한에서 왔다’고, ‘못 배우고 못 먹었을 것 같은 사람’이라고 인식하는 것만 같다.” / “탈북 후 1~2년간 대한민국에서 탈북자라고 불리며 같은 나라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혼자서 힘들었다.”

지난 5일 한국PD연합회(회장 오기현) 주최로 서울 목동 방송회관에 위치한 PD연합회 회의실에서 열린 제31차 통일방송포럼에 참석한 탈북 대학생들이 ‘탈북자’라는 단어에 느끼는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한 말들이다.

더 나은 삶을 찾아 대한민국으로 온 이들이 왜 단어 하나에 소외감과 자괴감을 느끼고 있을까. 탈북 대학생들은 ‘그저 단어 하나가 아니라, 탈북민들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의 온상이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탈북자가 아닌 한국인으로 불리고 싶다”

제일 먼저 마이크를 잡은 사람은 탈북민 정착지원 정보제공 사이트 ‘우리온’의 박OO 활동가였다. 박 활동가는 “탈북자라는 단어는 끝에 ‘자’자가 놈 자(者)자라 어감이 좋지 않아 탈북자라는 말에 거부감이 든다”는 의견을 표했다.

박 활동가는 “실제로 ‘우리온’에서도 북한 이탈 주민 130명을 대상으로 ‘어떤 말로 불렸으면 좋겠느냐’고 설문조사를 했는데 18%가 ‘나는 그냥 한국인으로 불리고 싶다’고 했고 그 외엔 탈북민, 새터민, 북한이탈주민 등 세 가지가 높은 득표수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반면 탈북 대학생인 김OO 씨는 “교회와 NGO(시민단체)에서도 ‘탈북 대학생 수련회’라는 말을 쓰는데, 탈북민들에게 선의를 베풀고자 하는 이들도 탈북자라는 말을 사용하는 걸 볼 때 일부러 차별을 하려고 그러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 씨는 그러나 “탈북자라는 단어가 아무렇지도 않게 사회에서 통용되는 것을 보면 한국 사회에서 탈북민과 그외의 주민들을 분리해서 생각하려는 인식이 고착화된 것 같다”며 안타까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탈북 대학생인 박OO 씨는 탈북민들이 탈북자라는 용어를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이유로 북한에 대하 고착화된 이미지를 꼽았다. 박 씨는 “남한에서는 ‘북한에서 왔다’고 하면 ‘왠지 북한에서 못 배우고 못 먹었을 것 같은 사람’이라고 인식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박 씨는 “나 같은 경우에도 탈북 후 1~2년간 한국에서 탈북자라고 불리며 (같은 나라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혼자서 힘들었다”며 “하지만 내가 탈북자가 아니라고 한다고 해서 아닌 게 되지 않고, 탈북자라고 밝혀서 학교에서 차별을 받은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젠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공동체 붕괴 현실, 탈북민 이해 노력 ‘발목’…“다큐멘터리 저널리즘 역할 필요”

탈북 대학생 조OO 씨는 “보통 탈북 청소년들은 대학에 새터민 특별전형으로 입학하는데, 한국외대의 경우 종합정보시스템에 ‘귀순 용사자’라고 표기했었다”며 “70년대에나 쓸 법한 말이라 학교 측에 시정을 요구했는데, 아직도 (시정이) 안 됐다”고 털어놨다.

그러면서 조 씨는 ‘탈북자’ 대신 어떤 말이 좋을까 생각해 봤다면서 ‘(함경북도) 청진 출신 서울 시민’이란 말이 어떻겠냐는 의견을 제시했다. 조 씨는 “남한에서도 경상도 출신이면 경상도 출신 서울 시민이라고 하니까 탈북민들도 그렇게 했으면 좋겠고, 그게 너무 길다면 ‘탈북민’이란 말이 그나마 덜 거북하다”고 말했다.

탈북 대학생 한OO 씨(세종대)도 “남한 사람들이 악의가 있어서 탈북자란 말을 쓰는 게 아니란 것은 안다”며 “다만 훗날에는 자연스럽게 탈북자라는 말이 쓰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고 말했다. 한 씨는 이어 “미디어에서 탈북민, 새터민 등의 단어로 순화해 사용하기 위한 노력을 꾸준히 한다면, 언젠간 그렇게 돼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전규찬 한예종 교수는 탈북 학생들이 ‘탈북자’라는 표현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만큼 이 단어의 사용을 지양하는 게 맞다는 입장을 밝혔다.

전 교수는 “우리(한국인)끼리는 ‘노동자’라는 말을 잘 안 쓰면서 유독 외국인들에게만 ‘외국인 노동자’라고 하는데, 그 말 자체에 ‘피부색 다르고 민폐끼치는 사람’이란 편견이 씌워져 있다”며 “외국인 노동자라는 말 자체는 법적으로 문제가 없지만 그들이 원하지 않으니 우리가 조심해 주는 게 맞다”고 말했다.

전 교수는 이어 “탈북자라는 단어 역시 그들을 ‘북한에서 탈출한 사람들’이라는 고정관념 속에 가둬, 결과적으로는 그들의 개성을 말살시키는 일이므로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 교수는 ‘탈북민’을 구분지어 호명하는 현실의 이유로 타인의 삶에 무관심한 사회를 짚었다. 전 교수는 “한국 사회를 보면 청년의 삶을 아무도 책임져주지 않는 현실로, 인간 소외가 이뤄지고 있는 상황”이라며 “그렇다 보니 탈북민이라는 타인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이라고 말했다. 공동체가 해체되는 한국 사회의 문제가 탈북민을 수용하고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방해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전 교수는 “미디어에서 남북한 청년들의 대화의 장을 꾸준히 열어주는 노력을 해야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며 “이게 바로 ‘다큐멘터리 저널리즘’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통일방송포럼 두 번째 참석이라는 이상연 tbs PD는 “탈북 대학생들의 말을 듣고 앞으로 방송 제작 과정에서 사소한 말 하나하나 주의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며 “탈북자라는 잘못된 프레이밍 해체하는 일에 PD 등 미디어 종사자들이 기여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남궁찬 MBC PD는 “오히려 그동안 탈북자라는 말보다 새터민이란 말이 더 차별적인 용어인 것 같아서 탈북자란 말을 사용했었는데 포럼에 와서야 틀린 생각이란 걸 알았다”며 “탈북자 프레이밍 해체를 넘어서 탈북민들의 생활을 가까이 들여다 보고 그들을 둘러싼 문제 해결을 모색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이날 포럼에 앞서 상영된 다큐멘터리 <정전60년 남북공존의 길을 찾아서(2013)>의 제작을 맡은 오현숙 CBS PD는 “프로그램을 제작하면서 탈북민들이 다른 나라에 가서 조선족이라고 속이고 다니는 걸 봤다”며 “조선족도 한국에서 차별받는 사람들인데, 탈북민들은 스스로를 조선족보다 더 차별받는 존재로 보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오 PD는 이어 “2013년 방송 제작 당시 남한에 탈북민이 2만 5000여 명이었는데, 2만 5000명도 제대로 품지 못하는 대한민국이 어떻게 2000만 북한 주민을 품겠냐”며 “통일의 시작을 탈북민들에 대한 작은 공감과 배려에서 시작된다”고 강조했다

이날 통일방송포럼의 논의 과정에서 나온 다양한 의견들은 향후 ‘탈북민 관련 방송PD 핸드북’의 제작 과정에 적극 반영될 예정이다.

오기현 PD연합회장은 “남북하나재단과 협력해 탈북민에 대한 인식 개선을 추구하는 매뉴얼과 책자를 만들고 있는데, 오늘 포럼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적극 반영해 현직 방송 PD들이 방송 제작할 때 지침서처럼 쓰이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한편 통일방송포럼은 2000년대 중반 이후 줄어든 북한과 탈북민들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고 탈북민에 대한 인식 개선을 추구하며 이를 방송 제작 과정에 반영하기 위해 PD연합회에서 정기적으로 개최하는 행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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