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탄치 않은 한 PD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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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탄치 않은 한 PD의 여정
[내 인생의 프로그램 ③]
  • 민지영 부산영어방송 PD
  • 승인 2020.08.07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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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주최하고 한국PD연합회가 주관한 ‘PD 글쓰기 캠프’가 지난 7월 8일부터 11일까지 파주 출판단지 지지향에서 진행됐다. 자기 성찰과 프로그램 질적 향상을 위해 기획된 글쓰기 캠프에 참여한 PD들이 ‘내 인생의 프로그램’을 주제로 쓴 글을 차례로 싣는다. <편집자 주>   
지난해 열린 부산국제영화제 공개방송을 부산영어방송과 GFN광주가 진행하고 있는 모습.
지난해 열린 부산국제영화제 특집공개방송을 부산영어방송과 GFN광주가 진행하고 있는 모습.

[PD저널=민지영 부산영어방송 PD] 내 고향은 시골이다. 서울에 대학을 와서 다들 “고향이 어디에요?” 물으면 “아, 전남 영암이라고 있는데 아세요? 모르시죠. 월출산이라고 산이 유명하고요. 또 F1이라고 유명한 자동차 경주도 열었는데… 모르시는구나. 괜찮아요. 다들 모르세요.” 라고 답했다. “고향이 어디에요?” 라고 물었을 때 서울이요. 부산이요. 제주도요. 그렇게 대답하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한 단어로 끝내는 그 간결함이 부러웠다.

4년 동안 사람들에게 열심히 고향을 설명하고 나니 그새 졸업할 때가 되었다. 아버지는 공무원 공무원 노래를 부르셨지만 죽어도 공무원은 하기 싫었다. 그렇다고 딱히 하고 싶은 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친구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야 누구야, 나한테 어울리는 직업 하나만 추천해봐.” 설문조사를 했다. 나를 몇 년간 봤으니 완전히 틀리진 않겠지. PD가 1등을 했다. 내심 결과가 마음에 들었다. 김태호, 나영석, 김민식. 이 멋진 이름들 옆에 민지영도 당당히 올리는 그 날이 오지 않겠는가.  

고향에 내려가 아버지에게 말씀드렸다. “아빠 나 PD할라고.” 아빠는 씹던 쑥떡을 내려놓고 말씀하셨다. “네가 철없이 누구 꼬임에 빠져가지고 PD를 한다고야. 테레비 같은 데 봐봐라. 카메라맨, 기자, PD 그런 사람들 체력이 보통 체력이 아니어야. 너는 바람만 불면 퐁 날아가게 생긴데다 발도 째깐해가꼬 안 돼. PD들은 다 덩치도 크고, 발도 크고, 깡다구도 좋아야.”

하지 말라니까 괜히 더 하고 싶었다. 부모님의 극심한 반대라는 역경과 고난을 물리친 이 시대의 ‘참피디 민지영’ 아름답지 않은가. 포털 사이트 언론인 취업준비생 카페인 ‘아랑’에도 가입하고 학교 PD 준비반도 참여했다. 그러나 경영난에 허덕이는 지상파 3사는 채용 공고를 내지 않았다. 기다리다, 기다리다 이제 그만 설문조사 결과 2위 직업으로 넘어가야 하는 게 아닐까 하던 찰나에 PD 채용공고가 하나 떴다. 지원했다.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더니 덜컥 합격했다.

아버지에게 전화드렸다. 

“아빠 나 PD 됐어.” 

“뭐야, 네가 PD가 됐다고야? 뭐 어디 PD가 됐대?” 

“그 부산영어방송이라고, 2000년대 말에 영어 교육을 활성화하려고 서울, 부산, 광주에 하나씩 만든 건데... 아무튼 영어 라디오 방송사야.” 

“뭐 어디? 부산영어방송? 뭐 그런 방송국이 있대?” 

“어 나도 몰랐는데 있대. 내가 거기 PD가 됐어.” 

“아따 뭐 이미 됐단께 때려치라 할 수도 없고 일단 축하한다잉. 요즘 취업도 어려운디 잘했다야. 라디오면 촬영하다가 바람에 퐁 날아가지도 않겄고.”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친구들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야 축하한다 지영아. 그래서 부산영어방송, 거기는 영어로 방송해?” 

“어. 여기가 2000년대 말에 영어 교육을 활성화 하려고 서울 부산 광주에 하나씩 만든 거거든? 라디오 방송이고, 부산시 산하고, 어쩌고 저쩌고.”

만나는 사람마다 똑같은 레퍼토리로 설명했다. 데자뷰다. 이 회사 이름도 설명이 필요한 게 아닌가! 최소한 부산 사람들은 다들 부산영어방송 알 줄 알았는데…. 부산영어방송을 아는 사람은 다음과 같았다. 부산영어방송사 전·현 임직원과 가족, 프리랜서 및 출연자와 가족, 영어를 잘하거나 잘하고 싶은 청취자, 시청 및 시의회 관계자. 이들을 제외하면 상황은 늘 비슷했다. 대학 때는 취직하면 상황이 나아지겠지 했는데 아니었다. 회사를 설명하고 나면 고향도 설명해야 했다. 나는 부산에서 일하는 전라도 사람이 아닌가! 난감한 일이었다. 

업무 차 전화를 건다. 

“안녕하세요. 저는 부산영어방송 민지영 PD라고 합니다.” “어디시라고요?” “부산영어방송이요. 저희는 공영 지상파 영어 라디오 방송산데요.” 

이렇게 설명을 해야 할 때면 가끔 K, M, S가 부러웠다. “안녕하세요. KBS 민지영 피디입니다.” 이렇게 한 마디로 끝내면 얼마나 산뜻한가. 그런데 실제로 상상해보니 섬뜩했다. 모두 K, M, S가 된 세상. 유명하지 않으면, 인기 있지 않으면 사라지는 세상. 중요한 건 모두가 유명해지는 게 아니라 유명하지 않아도 자신만의 존재가치를 지닌 다양한 것들에 유명해질 기회가 충분히 주어지는 것. 유명하지 않은 것들이 지탱하는 다양성의 가치를 인정하고, 나아가 존중하는 것. 그 가치를 셀 수 있는 무언가로 환산하지 않는 것. 

작가의 대표작이 때로는 작가 자신을 설명하듯 PD도 대표 프로그램으로 자신을 설명한다. 난 이런 철학, 이런 감성, 이런 가치관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설명이 필요 없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다. 언젠가는 설명이 필요 없는 부산영어방송을 만들고 싶다. 내 인생의 프로그램이자, 누군가의 인생 프로그램을 감히 만들고 싶다. 광고가 아니라, 협찬이 아니라, 사건 사고가 아니라, 좋은 콘텐츠를 통해 언젠가는 간결하게 답하고 싶다. 

“안녕하세요. 저는 OO 프로그램 PD 민지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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