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영방송 수난의 역사③ 문민정부부터 참여정부, 공영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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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대되는 언론자유...공영방송 체질 개선으로 이어지진 못해

왼쪽부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
왼쪽부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

“촛불혁명은 우리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었다. 개혁이 좌초하고 다시 적폐세력이 득세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상상하기 싫은 파국이 예상된다. 그들이 강요한 ‘좌우 프레임’과 ‘종북 프레임’을 압도할 ‘평화와 상생’의 패러다임을 세우기 위해 힘을 모아야 할 때다. 다시는, 다시는, 다시는, 다시는, 다시는 적폐세력이 돌아오지 못하도록…”

2017년, 6월항쟁 30년과 언론운동 30년을 정리한 글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이명박·박근혜 시절의 공영방송 유린이 얼마나 끔찍했으면 ‘다시는’이란 말을 다섯 번이나 되풀이했을까. 그로부터 5년 남짓, ‘그들’이 돌아왔다. 그리고 ‘상상하기 싫은 파국’이 펼쳐지고 있다. 그 파국의 끝이 어디일지 가늠조차 하기 어렵다.

왜 이 지경이 됐는지는 굳이 따지고 싶지 않다. 속 시원한 처방을 내놓을 능력도 아직은 없다. 공영방송의 수난은 왜 끊이지 않는 걸까? 특히 ‘국가기간 공영방송’ KBS의 독립성은 왜 끊임없이 위협받는 것일까? 이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공영방송 수난의 역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① KBS 시청료거부운동와 6월 항쟁 
  ② 노태우 정부의 방송구조개편과 방송인의 저항
   문민정부·국민의 정부·참여정부와 공영방송
  ④ 이명박 정부의 방송장악과 방송인들의 저항
  ⑤ 박근혜 정부와 촛불혁명, 그리고 방송 
  ⑥ 에필로그 : 2023년, 방송은 어디로 갈 것인가

[PD저널=이채훈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전 MBC PD] 이동관은 7월 28일 방통위원장 후보자로 지명된 뒤 "이제 대한민국에도 BBC인터내셔널이나 NHK국제방송같이 국제적으로 신뢰받고 인정받는 공영방송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TV수신료 분리징수로 공영방송의 재정적 기반을 파괴하는 상황에서 튀어나온 이 발언은 실소를 자아냈다. 현실은 정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동관이 방통위원장이 되면 KBS 2TV와 MBC 민영화를 추진 등 공영방송 파괴가 현실화할 거라고 많은 사람이 우려하고 있다.

돌이켜보건대 김대중 정부 시절은 KBS가 세계 수준의 공영방송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1998년 12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활동한 대통령 직속의 방송개혁위원회는 '방송 개혁의 방향과 과제'라는 자문 보고서에서 1공영 다민영 체제를 제안했다. KBS의 공익성과 공공성을 강화하기 위해 수신료 조정 및 2TV 광고 폐지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 보고서는 국회에서 여야 정쟁으로 번졌고, KBS 측이 구체적인 KBS의 미래 비전과 강도 높은 개혁안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흐지부지됐다.

이 보고서는 MBC를 민영화하자고 제안했다. 정수장학회 지분 인수, 지방사 민영화, 본사 민영화의 순서로 공개입찰하며, 대기업·언론사·외국 자본의 참여는 금지한다는 것이었다. MBC 구성원들은 반발했다. 방송민주화투쟁의 성과로 공익재단인 방송문화진흥회를 만들었고, 이러한 체제를 바탕으로 구성원들이 강력한 주인의식을 갖고 있는 MBC는 ‘이상적인 공영방송’인데 이를 상업자본에 넘기는 것은 방송의 공영성을 후퇴시킬 게 예상됐다. 정치권과 학계 일각에는 MBC는 소유구조는 공영이지만 광고로 재원을 마련하기 때문에 위상이 애매하다고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MBC 구성원들이 보기에 이는 “MBC의 역사성과 특수성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말”이었다. 김대중 정부는 MBC 민영화를 포기했다.

1999년 2월 공영방송 노조들은 '방송개혁위원회는 더 이상 개혁을 논하지 말라'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하고 반대시위에 나섰다. ⓒKBS 뉴스9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이 집권한 1993년~2008년까지 15년 동안 공영방송이 ‘수난’을 겪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를 겪으면서 언론자유는 점차 확대됐다. 노태우 정권과 맞설 때처럼 정부와 적대적으로 투쟁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정부가 방송을 물리적으로 장악하려고 시도했다는 증거는 없다. 기자 사회가 어땠는지는 알 수 없지만, PD들이 프로그램을 제작할 때 외부의 간섭을 받은 사례는 없다. 2005년 MBC의 황우석 논문조작 보도는 노무현 정부 입장에서도 불편한 내용이었다. 노 대통령은 “이제 그만 좀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지만, 이 발언이 <PD수첩> 제작진에게 압력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기간 내내 ‘세계화’의 구호를 들어야 했고, IMF구제금융을 겪어야 했고, 마침내 한미FTA를 목격하게 됐다. 신자유주의의 격류에서 방송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콘텐츠 경쟁은 점점 더 심해졌다. 1993년 홍두표 KBS 사장과 강성구 MBC 사장은 “시청자가 보지 않는 것은 프로그램이 아니”라며 강력한 시청률 드라이브를 걸었다. 상업방송 SBS와 케이블TV 출범에 대한 대응이었지만 공영방송의 앞날을 고려하면 매우 근시안적인 태도였다. PD연합회는 회원들이 시청률지상주의에 매몰되지 않도록 넓은 시야를 제공하려고 노력했지만 힘에 부쳤다. (《6월항쟁에서 촛불혁명으로 – 한국PD연합회 30년》 p.90~91) 방송노동자는 생존을 위해 자사이기주의에 빠지는 양상을 보였다. 경쟁이 심화되면서 광고영업이 점점 더 중요해졌고, 미디어랩 설치를 두고 방송사 간의 진통과 갈등이 이어졌다.

대중들에게 인기있는 프로그램은 역시 예능과 드라마였다. TV 예능·드라마의 연출 테크닉은 눈부시게 발전했고 나날이 자극적인 내용으로 재미를 더해 갔다. K-POP과 드라마 한류가 약진하기 시작했다. 한류는 단순한 문화 아이콘을 너머 가장 좋은 수출 상품으로 간주됐다. 미국, 일본 방송의 영향 아래 성장한 한국 TV는 이제 미국, 일본 방송을 능가할 정도로 재미있어졌다. 2007년, 홍세화 선생은 경고했다. “한국의 방송은 너무 재미있다. 특히 텔레비전은 사회 구성원들을 드라마 중독에 걸리게 한 원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데, 이젠 스스로 친 그물에 공공성을 가둔 지경이다.” (홍세화 <몰상식한 사회의 즐거운 TV>, PD저널 2007. 2. 7)

이 무렵, EBS에서 <톨레랑스>를 폐지했다. 우석훈 당시 성공회대 교수는 “교육 논리에서 ‘관용’이 사라지는 상징적 사건이자 우리 사회를 지옥으로 한 발 더 가깝게 만드는 사건”이라며 이렇게 덧붙였다. “경쟁이 극대화된 시장에서 승자가 모든 것을 다 갖고, 그 대신 패자들에게는 내일은 없다는 메시지가 시대정신이다.”(우석훈 <승자독식 사회와 ‘톨레랑스’의 주검> 한겨레신문 2007. 2. 1)이 무렵, 우석훈 교수의 <88만원 세대>가 나왔고 사오정, 오륙도, 삼포세대 같은 자조적인 용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2007년 2월 1일 자 한겨레신문. 우석훈 '승자독식 사회와 톨레랑스의 주검' 칼럼

TV의 ‘무한 시청률 경쟁’에 ‘무한 기술 경쟁’이 덧칠됐다. 테크놀로지의 발전은 시청자의 요구가 아니라 자본의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하드웨어를 개발하고 수출 시장을 선점하려는 대기업의 발빠른 경쟁은 시청자의 요구와 관계없이 끝없는 뉴미디어 경쟁시대를 열었다. 김영삼 정부는 케이블TV, 김대중 정부는 위성방송, 노무현 정부는 DMB를 내놓았다. 시청자 국민이 원한 게 아닌데도 더 좋은 화질을 명분으로 디지털 TV, HD-TV, UHD-TV 등 새로운 송출방식이 등장했다. 이 흐름을 거부하는 것은 시대에 역행하는 걸로 간주됐다.

방송사는 시대에 대한 치열한 고민과 통찰에서 좌표를 설정한 게 아니라 정글의 법칙에 수동적으로 휩쓸려 좌충우돌했다. 자본의 질주 속에서 ‘언론 자유’라는 말은 점점 더 공허해져 갔다. “무한 경쟁의 탁류 속에서 누리는 언론의 자유가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느냐”는, 더욱 근본적인 물음이 앞을 가로막기 시작했다. 인간이 자본을 닮아 가며 상식과 공정이란 말도 애매해졌다.

조선일보를 위시한 수구 신문들도 언론자유를 맘껏 누렸다. 자본이 직접 지배하는 신문사들은 앞다투어 ‘보수’를 참칭하는 수구 집단으로 변해 갔다. 언론의 정파성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조선일보는 ‘비판언론’을 자처하며 공직자에 대한 사상검증으로 정권을 압박했고, 이에 수구 야당이 화답하며 정쟁을 유발했다. 이 상황에서 공영방송의 행보는 본의와 다르게 정파적 입장으로 인식될 위험이 있었다.

KBS <한국사회를 말한다>와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레드 콤플렉스와 반공 이데올로기 때문에 방송하지 못한 현대사의 비극과 구조적 모순을 다루었다. 현대사의 수레바퀴 아래서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은 공영방송이 당연히 해야 할 몫이었다. 그러나 수구 언론과 정치세력은 이러한 프로그램을 ‘좌파방송’으로 낙인찍었다. KBS <미디어 포커스>와 MBC <미디어 비평>은 시청자들의 미디어 리터러시에 기여하는 프로그램으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에서 비판받은 ‘조중동’은 KBS와 MBC를 ‘정권의 하수인’으로 부르며 공격에 나섰다. 이런 프로그램은 공영방송이 언젠가는 해야 할 프로그램이었지만, 수구 언론들은 “정권과 코드를 맞춘다”며 공영방송을 비난하기 바빴다.

1999년 첫 방송된 MBC '이제는 말 할 수 있다'
1999년 첫 방송된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1997년 IMF 구제금융에서 2008년 미국발 세계금융위기까지 KBS와 MBC의 위상과 체제는 변화 없이 유지됐다. 하지만, 변화가 없다는 것 자체가 비극을 예고하고 있었다. 100%의 언론자유를 누리던 이 시기, 공영방송을 더 건강하게 세우기 위한 계획과 노력이 부족했던 건 뼈아픈 사실이다. 더 공정하고 진실된 방송을 위한 법 · 제도의 보완, 보도와 제작의 준칙, 연수와 인력양성, 다양한 시청자를 위한 서비스 개선 모색 등 다양한 노력이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공영방송의 체질 개선과 역량 강화로 이어지기에는 미흡했다.

참여정부 들어서 갈등과 대립은 점점 더 격화됐다. 이 신문들은 공영방송을 ‘참여정부의 나팔수‘라고 부르며 공격을 강화했다. 참여정부는 ‘조중동’을 법대로 처리하는 대신, 그들과 멱살잡이를 하면서 오히려 힘을 키워 주었다. 노조 위원장 출신의 기자가 사장이 되고, 사장 퇴임 후 정치권에 입문하는 사례가 생기면서 정파적 대립은 더욱 심각해졌다. PD들은 정치권을 접촉할 일이 없기 때문에 이렇다 할 외압 없이 프로그램에 몰두할 수 있었다. 기자들이 정치권과 어떻게 교감하고 유착하여 수구 세력에게 비판의 빌미를 주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아무튼 수구 언론과 정치세력에게는 공영방송이 친여방송으로 비쳤던 모양이다. 이 상황에서 정권 교체는 공영방송의 파국을 예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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