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추자부터 손담비까지: 섹시 댄싱퀸의 존재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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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획(2)] 여성 대중음악 뮤지션을 말한다

<여성 대중음악뮤지션을 말한다> 연재기획 순서

1. 여성가수의 음악을 둘러싼 편견들
2. 섹시 댄싱퀸의 존재론 (1): 김추자에서 손담비까지
3. 섹시 댄싱퀸의 존재론 (2): 김추자에서 손담비까지
4. 중성 혹은 남성형 캐릭터들: 피터팬과 톰보이 사이에서
5. 주술자, 사제, 여신, 그리고 뮤즈
6. 다양한 유형을 한 자리에: 여성 그룹 (1)
7. 새로운 세대, 새로운 여성 그룹 (2)
8. 전기기타를 든 여자들
9. 여성 싱어송라이터의 계보학
10. 홍대 앞 여성 뮤지션
11. 아직도 못다 한 이야기들

여성 뮤지션에게 나타나는/기대되는 가장 흔한 형태는 섹시한 유형이 아닐까. 바다 건너에 마돈나를 원형으로, 브리트니 스피어스와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최근의 레이디가가 등이 섹시 아이콘으로 숭배 받았다면, 우리는 가령 1970년대의 김추자를 하나의 진원을 삼고, 1980년대의 김완선을 지나, 1990년대의 엄정화, 2000년대의 이효리나 손담비 등을 계열화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뇌쇄적인 관능성으로 중무장한 팜므파탈들은 아름다운 얼굴과 몸매, 요염한 춤과 자극적인 목소리로 듣는/보는 이들을 유혹한다. 이들은 (대개는 부정적인 의미에서) 남성의 관음증적 시선이 반영된 상상적 욕망의 대상으로, 스펙터클한 소비자본주의의 화신으로 군림해왔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마돈나이다. 그에 대한 평가는 많지만 간단히 요약하면 순진한 처녀, 숭고한 성녀, 관능적인 요부 등 다양한 이미지로 남성·서구·백인 중심의 권위에 도전을 했다는 것이다. 자신을 상품화하는 처세술을, 다의적인 문제적 텍스트로 조탁시킨 마돈나. 그녀를 그 누구와 비교할 수 있을까. 한 프랑스 철학자의 말마따나 “굉장한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있거나, 아니면 아예 하나도 없거나, 어쩌면 이 둘을 모두 갖고 있는” 마돈나가, 과거의 많은 여성 유명인들과 동성애적 하위문화 코드 등 수많은 것들을 흡수시켜 탄생한 복제물에 불과하다고 해도, 마돈나를 능가할 복제물은 없다. 하지만 어떠랴.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복제해낸 흥미로운 산물들이 여기, 만개하고 있으니.

신체, 그리고 욕망의 실현, 그 시작과 끝

화려한 외모와 패션, 농염한 자태의 춤. 신체로부터 분출되는 이런 요소들이 어쩌면 섹시형 여성 뮤지션들의 전부인지도 모른다. 1970년대 소울·사이키델릭의 화신 김추자가 몸에 딱 붙는 판탈롱 차림에 흐느적거리듯 춤(이라기보다는 손짓과 몸짓)을 춘 일은, 지금 보면 참 촌스럽지만,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사건이었음에 틀림없다. 풍부하고 강렬한 창법, 육감적인 도발성이 내장된 ‘율동’ 등 모든 면에서 당시 여성 보컬리스트에게 기대되었던 이미지와는 달랐던 것이다. 하지만 보다 본격적인 댄스 시대의 개막은 컬러 TV, 뮤직비디오가 주도적인 매체가 되는 1980년대부터일 것이다. 김완선으로 대변되는 패션, 즉 부풀린 머리, 어깨에 ‘뽕’이 들어간 ‘오버사이즈’ 재킷에 승마바지, 혹은 발레리나를 연상시키는 하늘거리는 스커트에 컬러풀한 레깅스와 목이 긴 하이탑 슈즈. 원색적이고 강렬하고 과장된 이런 패션의 양상은 어쩌면 1980년대 경제호황기의 한 초상일지도 모른다.

▲ 김추자(The Golden Hits Parade, 1984)
섹시형 여성 뮤지션들은 그때그때에 따라 다르게 치장된다. 이는 ‘백치미’ 같은 것이다(혹은 이를 가장한다). 이는 일종의 ‘가면’이다. 포스트페미니스트들이 주창해온 ‘가장이론’을 끌어올 필요는 없지만, 화장과 치장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치장과 화장은 음악의 변화도 단박에 드러내주는 기제로 작용한다. 그런 점에서 얼굴을 가꾸고 몸을 꾸미는 일이란, 피상적이고 깊이 없으며 음악외적인 것으로 승부하려 한다는 부정적인 의심을 살 수 있는, 그러나 어쨌든 하나의 무기이자 방패가 되는, 양날의 검 같은 것이다. 박지윤이 JYP엔터테인먼트의 뮤즈로 활동하던 때의 짙은 화장과 도발적인 의상은 싱어송라이터로 변신을 한 최근의 모습과는 대조적인 것이다. 말하자면 지금의 자연스러운 모습조차 일종의 ‘가장’이다.

무엇보다 관능적인 춤은 이들에게 노래나 연주 이상의 음악 언어가 된다. 1980년대의 예를 들면, 김완선이나 박남정을 비롯해 당시 댄스키드들은 바로 마이클 잭슨이나 마돈나, 그리고 브레이크 댄스의 수혜자들이었다. 당시 청소년기를 보낸 이들에게는 ‘웨이브’나 ‘문워크’를 추는 김완선의 모습이 스냅사진처럼 남아있을 것이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오면 또 어떤가. 박지윤이 손을 머리에 올리고 검은 롱스커트 차림의 몸을 요염하게 흔들며 붉은 입술에 건네는 유혹적인 시선, 또는 ‘콘헤어’를 한 이효리가 에릭과 함께 힙합 비트에 파워풀하고도 인상적인 ‘크럼핑 댄스’를 추는 장면은 시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섹시한 유형의 컨셉은 10년이 흐르고, 20년이 지나도 ‘반복’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단순반복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운 차이들을 발생시킬 뿐더러, 때로는 그 차이들 사이의 간극이 상당히 크기도 하지만. 그 모태는 결국 마돈나라는 사실에 변함이 없다. 1980년대 후반 당시 김완선은 ‘한국의 마돈나’라 소개되었으며, 1990년대 섹시 아이콘 엄정화의 벤치마킹 대상도 마돈나였다. 요즘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손담비가 김완선을 닮았다는 인상은 바로 김완선 및 1980년대의 패션과 춤을 현재적으로(혹은 ‘미래주의’적으로) 퓨전한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마돈나라는 뛰어난 복제품을 원본으로 삼아 다시 모방하고, 그걸 또다시 인용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사실 대중음악(나아가 많은 문화적 산물)이란 어쩌면 이렇게 그저 모방하면서 ‘차이’들을 만들어내는 것 이상이 아닌지도 모른다.

도도하고 당당한 그녀들

지금 살펴보고 있는 가수들의 노래들에는, 사랑의 기쁨이나 실연의 아픔을 소심하고 은밀하게 표현하는 전형적인 방식도 등장하지만, 섹시한 여성 화자들의 대범하고 적극적인 표현 양상이 더 두드러진다.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이들은 남자의 구애를 가만히 기다리기보다 먼저 적극적으로 남자를 유혹한다. “그대와 단 둘이서 지샐 우리 밤을 난 기다려 왔어(...)오늘밤 그대를 유혹할래”(엄정화 〈초대〉, 1998), 또는 “내 손만 잡으려 말고 날 안아봐 두 눈 다 꼭 감은 채로 느낌을 봐 가슴이 참 복잡할 땐 날 바라봐 난 널 유혹하는 거란다”(아이비 〈유혹의 소나타〉, 2007)라고 속삭인다. 여자친구가 있는 남자조차 “내 것이 되는 시간”은 단지 10분밖에 걸리지 않는다고 호기롭게 공언한다(이효리 〈10 Minutes〉, 2003).박지윤의 노래 속 화자는 자신이 더 이상 소녀가 아닌 성인이 되었다며 구애를 한다(박지윤 〈성인식〉, 2000).

▲ 아이비(왼쪽), 이효리 ⓒSBS, KBS
이들은 자신에게, 타인에게 아주 당당하고 자신감에 넘친다. “난 스스로 빛나는 girl(...)난 너무 예뻐(...)난 도도해 또 똑똑해”(손담비&애프터스쿨 〈아몰레드〉, 2009)라고 표명하거나, “나는 달라 그녀와 날 비교하진 말아줘”(이효리, 위의 곡)라고 선언한다. 이렇게 평범한 다른 여자들과의 차별을 선언하면서 그들을 공격하는 것 같다가도, 그들을 위로하고 대변하거나 선동하기도 한다. 이효리의 〈U-Go-Girl〉(2008) 뮤직비디오에서는 “이제부터 솔직하게 이제부터 당당하게 너의 맘을 보여줘 바로 이 순간 지금 이 순간 tonight”이라는 가사에 걸맞게, 세련되고 섹시한 이효리가, 촌스럽고 어수룩한 이효리를 부추기는 것 같다.

하지만 이들은 저돌적이고 적극적인 모습과, 수동적이고 전형적인 여성상 사이를 혼란스럽게 오간다. 도발하되 선을 넘지 않는다. 시대는 변했고 노래 속 여성의 모습도 달라졌지만, 이별의 아픔과 배신의 상처에 아파하고 슬퍼하는 전형적인 여성 화자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널 잃은 아픔에 찢어진 가슴에 텅 빈 내 마음에 난 이제 어떻게 살아”(손담비 〈토요의 밤에〉) 한탄하며 고통스러워한다. 말하자면 이들은 희생자인 동시에 승리자인 것이다(혹은 그렇게 연기한다).

이들은 때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기도 한다. 크고 작은 가십이나 스캔들까지도 (다른 연예인들도 그러하지만) 섹시한 여성 뮤지션의 존재의 일부가 된다. 멀리는 1970년대 김추자의 ‘간첩설’ ‘노팬티설’ ‘라이벌과의 싸움’ 등부터, 최근 백지영이나 아이비 등의 ‘동영상 파문’에 이르기까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종국에는 자신의 생명력까지 단축시키기도 하는, 이러한 풍문과 사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 최지선 대중음악평론가
여러 가지 점에서 이들에게 모든 사람들이 고운 시선을 보낸 건 아니었다. 아이들은 환호하고, 어른들은 걱정했다. 그것은 여성을 바라보는 낙인과도 같은 것이었다. 어둡고 암울하던 통제와 억압의 시절, 김추자의 ‘소울 가요’는 퇴폐·선정·저속이라는 선고를 받았다. 지금이라고 해도 다를 바는 없다. 많은 곡들이 기독교 혹은 청소년 단체의 표적이 되었고 방송사 등지의 심의라는 그물망을 통과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이들이 정말로 기존의 질서를 위협하고 제도와 규범을 위반하였는가. 일면 저항적인 면모로 유혹하고 일탈을 꿈꾸(게 하)지만, 잠깐 동안 일종의 청량제 혹은 탈출구 역할을 하지만, 대개는 기존의 것들에 순응하게 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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