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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3.28 13:06
  • 수정 2020.03.31 17:07

"'23.5' 메시지는 내가 살기 위해선 너도 살아야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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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공사창립특집 대기획 '23.5' 연출한 최필곤 PD "반목의 계절, 연결성 보여주고 싶어"
"솟폼 제작 대세이지만, 긴 호흡의 대작도 필요해"

KBS 공사창립특집 대기획 '23.5' 스틸컷 모음 ⓒ KBS
KBS 공사창립특집 대기획 '23.5' 스틸컷 ⓒ KBS

[PD저널=이미나 기자] '기울어져서 아름답다.' 최필곤 PD가 기록적인 폭염이 이어지던 2016년의 어느 여름날, '여름은 왜 더울까'를 생각하던 끝에 기획안 첫 머리에 쓴 문장이다. 총 16억 원의 제작비, 3년여 간의 제작기간이 투입된 KBS 공사창립특집 대기획 <23.5>의 시작이다. 45억 년 전 지구는 화성 크기의 행성과 충돌했고, 그 충격으로 지구의 축은 23.5도 기울었다. 이 절묘한 기울기가 지구에 계절을 가져왔고, 생명이 태동할 토대를 마련했다.

지난 3일부터 26일까지 총 4부작으로 방송된 <23.5>는 총 15개국을 배경으로 대자연이 빚어낸 장관을 담아냈다. 1편에서는 겨울과 봄이 교차하는 남극과 북극을, 2편에서는 비를 기다리며 생존을 위한 싸움을 이어가는 남수단의 딩카족과 불볕더위를 견디며 비 냄새가 담긴 향수를 만드는 인도의 장인을 대비적으로 보여주며 개별적 현상이 실은 연결성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같은 조상을 두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인도네시아의 바자우족과 마다가스카르의 베조족을 조명한 3부와 히말라야 깊숙이 세워진 마을에서 '저 너머의 문명'을 동경하는 20살 청년의 삶을 그린 4부 역시 '23.5도의 기울기는 생명의 에너지였고, 문명의 나침반이었다'는 다큐멘터리의 주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27일 만난 최필곤 PD는 "넓고 큰 지구를 모두 가볼 수는 없는 노릇이라, 한 편에 두 지역 이상을 촬영하고 그 지역 간의 대비를 통해 (시청자가) 지구를 느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며 "서로 다른 두 지역에서 별개의 사건이 전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의 흐름에서 모두 기승전결이 있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그런 점에서 <23.5>는 때론 압도적이기까지 한 대자연의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면서, 동시에 인간의 근원과 삶의 순환원리를 담은 인문학적 다큐멘터리기도 하다. <역사스페셜>, 다큐멘터리 <의궤-8일간의 축제>,<황금 기사의 성> 등을 연출해 온 최 PD의 색깔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어쩌면 우리는 '반목의 계절'을 지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서로 질타하고, 조롱하고, 구분하는 게 팽배한 상황이죠.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요. '연결돼 있다'는 느낌을 주고 싶었던 건 그래서예요. 서로가 달라 보이지만, '네가 죽으면 나도 죽는다' '내가 살기 위해선 너도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죠."

KBS 공사창립특집 대기획 '23.5' 촬영 현장 모습 ⓒ KBS
KBS 공사창립특집 대기획 '23.5' 촬영 현장 모습 ⓒ KBS

하지만 <23.5>는 이 같은 메시지를 직접 화법으로 시청자에 전달하는 것을 피했다. 대신 간접적으로 이를 느낄 수 있도록, 배우 김응수의 간결한 내레이션과 장면의 구성을 세심히 활용했다. 최필곤 PD는 "(주제에 대한) '입장'을 밝히는 것이라 표현하고 싶다"며 "다큐멘터리의 영역에선 PD의 입장이 '도그마'가 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황제펭귄이 남극에 도착할 시점에, 이미 남극을 떠나야 했던 아델리 펭귄 한 마리가 덩그러니 남은 장면이 그 예다. 우연히 제작진의 카메라에 담겼다가, 편집 과정에서 발견됐다는 이 장면은 묘한 여운을 남긴다.

"진짜 남극의 문제는 길을 잃은 귀여운 아델리 펭귄 한 마리가 아니라 펭귄 전체의 생존이 위협받고 있단 것이거든요. 기후변화가 남극의 얼음을 모두 녹이고 있고, 그러면서 플랑크톤도, (펭귄의 먹이가 되는) 크릴새우도 사라지고 있으니까요.

이번에 저도 한 수 배운 건데, 너무 거대한 담론을 이야기하기보단 아주 사소한 이야기로 접근하는 게 (시청자에겐) 더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겠더라고요. 기후변화 담론은 이미 오래 전부터 여러 사람들이 우려의 목소리를 내왔지만, 실제 현실에서 사람들이 (심각성을) 받아들이는 정도는 크지 않았죠. 그런데 아주 작은 것이 그런 문제를 해결하더라고요. 길을 잃은 아델리 펭귄을 통해 기후변화의 심각성에 대한 인식까지 남길 수 있는 것 처럼요."

남수단 수드 습지 지역에 터전을 잡은 딩카족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은 것 역시 <23.5> 제작진에겐 빼놓을 수 없는 성과다. 제작진은 영국의 BBC마저 들어가지 못한 이 땅을 1년여 간 오가며 촬영을 진행했다.

최필곤 PD는 제작 중 가장 기억나는 장면으로도 주저 없이 남수단에서의 촬영을 꼽았다. 별 말 없이도 뜻이 통했던 7살짜리 꼬마 '뎅', 중점적으로 촬영해보려던 찰나 무리에서 사라져 죽음을 맞은 '마코로'의 늙은 소의 이야기는 앞서 2부에서 방영된 대로다.

방송에 담지 못한 '웃픈' 일화도 있다. 촬영감독이 풍토병에 걸려 수술을 받은 것이다. 국내 의료진 중 누구도 정체를 몰랐던 그 병은 현지 의료진에겐 어처구니없을 만큼 손쉬운 문제였다. 최 PD는 "한국에서 최고의 의사도 어쩔 줄 모르는 일을 그곳에서는 너무도 쉽게 해결하더라"며 "우리도 모르게 아프리카 대륙을 낮게 보거나 대상화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 일을 겪으면서 경각심이 생겼다"고 회상했다.

KBS 공사창립특집 대기획 '23.5' 스틸컷 ⓒ KBS
KBS 공사창립특집 대기획 '23.5' 스틸컷 ⓒ KBS

최근 방송가에선 '대작'으로 분류될 만한 다큐멘터리의 제작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온라인 플랫폼의 급부상으로 짧은 호흡의 콘텐츠가 각광받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최필곤 PD는 그럴수록 긴 호흡을 가진 다큐멘터리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지구의 기울기에 따라 계절이 교차하고 해류가 순환하듯, 짧거나 긴 호흡의 작품들이 공존할 때 비로소 콘텐츠 생태계가 건강할 수 있다는 의미다. <23.5>의 비하인드 영상, VR 영상 등을 유튜브에 공개해온 것도 이 때문이다.

"지구에 겨울만 있다거나 여름만 있다면 어떨까요. 서로 리드미컬하게 교차해야 생명이 살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콘텐츠로 마찬가질 거예요. 4부작 다큐멘터리가 있어야 5분짜리로 이걸 쪼개 보는 콘텐츠도 살 수 있겠죠. 할리우드나 BBC의 좋은 이야기도 시작은 다 작은 데서 출발했을 거예요. 그러다가 생각할 수 없었던, 큰 규모의 무엇인가가 만들어졌겠죠.

영화가 나왔을 때 사람들은 '라디오는 끝났다'고 했고, TV가 나왔을 땐 '영화는 이제 끝났다'고 했어요. 하지만 지금까지 라디오도, 영화도 건재하죠. TV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이제 온라인의 시대라 하지만, TV 역시 시간이 지나면 발전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23.5>를 만들면서 짧은 콘텐츠도, 긴 호흡의 콘텐츠도 다 나름의 쓸모가 있단 걸 느꼈어요. 다음 작업에서 누군가 '유튜브 콘텐츠는 어때'라고 물어도, '더 큰 스케일의 콘텐츠는 어때'라고 물어도, 저는 다 좋다고 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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