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회 한국PD대상, 악천후 속 값진 풍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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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회 한국PD대상 수상작을 돌아보며
시대의 핵심 문제 직면한 PD들...참신한 설득전략과 제작기법 돋보여

지난해 좋은 평가를 받고 37회 한국PD대상 수상을 겨룬 작품들. 
지난해 좋은 평가를 받고 37회 한국PD대상 수상을 겨룬 작품들. 

[PD저널 =이채훈 전 한국PD연합회 정책위원/<모차르트 평전> 저자] 2024년의 제작 환경은 녹록지 않았다. PD들은 해가 갈수록 심해지는 생존경쟁으로 허리띠를 졸라맸고, 방송통신위원회와 방송통신심의위원회를 앞세운 권력이 제작 자율성을 침해할세라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 연말의 계엄 사태는 한국 민주주의를 풍전등화의 위기에 몰아넣기도 했다.

제37회 한국PD대상 출품작들은 이런 환경 속에서도 우리 PD들이 흔들림 없이 프로그램에 매진해 왔음을 확인케 해 주었다. ‘돈의 얼굴’부터 ‘고독사 문제’와 ‘성소수자 가족’까지 이 시대의 핵심 문제를 직면하려는 PD들의 의지가 펄펄 살아 있었고, 다양한 시청자의 감수성에 호소하는 참신한 설득 전략과 제작 기법이 넘쳐났다. 

올해의 PD상

스튜디오 슬램의 윤현준 PD가 넷플릭스 히트작 <흑백 요리사>로 ‘올해의 PD상’을 받은 것은 모두 기뻐할 일이다. 넷플릭스 예능 부문 세계 1위에 오른 이 프로그램은 K-드라마, K-팝에 이어 K-예능의 약진을 실감케 했다. 경제력이나 국방력도 중요하지만 민주주의의 힘과 드높은 문화의 힘이 더욱 소중하다고 볼 때, K-예능이 우리 문화의 중요한 축으로 자리잡도록 기여한 윤 PD의 공은 매우 크다. <오징어게임>에 이어 <흑백 요리사>가 세계의 주목을 받은 게 우리 사회의 심각한 계급 갈등 덕분이기도 하다는 점이 다소 우울하긴 하다. 

EBS ‘저출생 인구위기 대응 프로젝트’를 담당한 PD들도 ‘올해의 PD상’을 수상했다. ‘출산율 0.78명’이란 자료에 미국의 조앤 윌리엄스 교수는 머리를 싸매며 “와, 대한민국 완전히 망했네요”라고 탄식했다. 이 위기를 진단하고 대책을 제시하기 위해 <다큐멘터리K> 6부작, <위대한 수업> 4부작, <창사특집 조앤 윌리엄스와의 대화> 등 각종 특집은 물론 연중 캠페인까지, 여러 PD들이 소중한 피땀을 쏟아부었다. 이 위기는 앞으로 더 심해질 걸로 우려되는 바, 국민들에게 오래 기억되고 정책 담당자에게도 영향 미칠 수 있는 ‘결정판’을 기대해 본다. 

실험정신상을 수상한 MBC '故 정은임 아나운서 20주기 특집–여름날의 재회'
실험정신상을 수상한 MBC '故 정은임 아나운서 20주기 특집–여름날의 재회'

실험정신상

‘실험정신상’ TV부문은 EBS <딩동댕 유치원>(연출 이지현 이승주 조윤선)이 차지했다. 어린이 프로그램에서 금기시되어 온 ‘유아 성교육’ 특집 2부작을 방송했고, 장애 어린이, 다문화 가족, 이혼 가정 문제를 진솔하게 다루었다. 하늘이, 별이 등 생생한 캐릭터와 예쁜 일러스트를 활용하여 유아의 눈높이에 맞게 전달했고, 노래 장면을 뮤지컬처럼 연출하여 어른도 재미있게 볼 수 있게 했다. “어떤 아이도 소외되지 않는 세상”을 만들자는 초심을 잃지 않고 700편 이상 방송한 것은 대단한 업적이 아닐 수 없다.

‘실험정신상’ 출품작은 TV든 라디오든 AI를 활용한 프로그램이 많았다. 라디오 부문은 MBC <故 정은임 아나운서 20주기 특집–여름날의 재회>(연출 장수연 양지안)가 수상했다. <FM영화음악>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정은임 아나운서를 추모하는 기획이었다. 1부 다큐멘터리는 박찬욱, 정성일, 손석희 등의 회고를 통해 그를 되살렸고, 2부는 그의 목소리를 AI 기술로 재연하여 <FM영화음악> 한편을 선물했다. 가상의 정은임이 고공농성 중인 노동자의 고독을 얘기한 뒤 “앞으로 외롭다는 말을 아껴 써야겠다”고 말할 때 그가 살아 돌아온 느낌이 들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TV 작품상

‘작품상’ TV시사다큐멘터리 부문은 MBC창원 <엄마의 말뚝>(연출 조현우)에게 돌아갔다. 故 윤승주 일병 등 군대 폭력 희생자의 어머니들이 10년 동안 군 인권문제를 제기하고 성과를 거둔 이야기를 담았다. 이예람 하사와 채수근 상병 사건까지 연결했고, 박정훈 대령과 같은 참군인을 소개했다. “신병으로 보충할 수 있는 군인의 생명은 소총만도 못하다”는 공복순 씨의 발언은 깊은 울림을 일으켰다.

안타깝게도 수상하지 못했지만, SBS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연출 이동원 고혜린 박기영 왕성우 김경묵 김로사)는 큰 화제를 낳은 수작으로, 특히 김민기를 잘 모르던 젊은 세대들이 열광적으로 호응했다. EBS <다큐프라임 돈의 얼굴>(연출 이혜진 박재영)은 “한때 신을 중심으로 돌아가던 세상은 이제 돈을 중심으로 돌아간다”며 알 듯 모를 듯한 돈의 흐름을 알기 쉽게 설명했다. 돈을 화두로 우리 사는 자본주의 세상을 풀이한 재미있는 다큐멘터리였다. 

SBS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
SBS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

TV교양정보 부문 수상작은 EBS <다큐멘터리K 6부작 - 우리는 선생님입니다>(연출 정성욱 이규대 최홍석 임완식)였다. 서이초 교사의 사망 이후 심각하게 제기된 공교육 붕괴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었다. 6개월 동안 현장 교사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취재하여 교육계 안팎의 뜨거운 호응을 이끌어냈다.

아깝게 탈락했지만 JTBC <모든 패밀리>(연출 임지수 전청림 정나래)는 레즈비언 엄마 등 성소수자 가족의 아픔과 꿈을 그린 수작이었다. OTT 웨이브 오리지널로, 교양 프로그램의 활로를 넓힌 것도 소중했다. EBS <다큐프라임 3부작 - 내 마지막 집은 어디인가?>(연출 채라다)는 노인의 인권과 존엄사 문제를 다룬 주제의식이 돋보였다. 

‘작품상’ TV드라마 부문은 MBC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연출 송연화), TV예능 부문은 MBC <나 혼자 산다-기안84 레이스데이 in 뉴욕>(연출 박수빈), TV독립제작 부문은 KBS <다큐 인사이트-짜장면 랩소디>(연출 백헌석 신상용 정은비 김채영 전진선), 지역 정규 부문은 KNN<사라진 미>(연출 권재경 전윤재), 지역특집 부문은 G1방송 <경계탐구 파노라마 세계의 벽>(연출 홍대선 손승원)이 수상했다. 세세한 코멘트가 필요 없을 정도로 빼어난 작품들이다. 

tbn충북의 '음악다큐 - 신경림을 들어본다'
tbn충북의 '음악다큐 - 신경림을 들어본다'

라디오 작품상

‘작품상’ 라디오 음악오락 부문 결선에 오른 세 작품은 모두 의미 있는 다큐멘터리였다. 수상작은 JTV 전주방송 <슈퍼노바 김명곤의 사운드혁명>(연출 송의성)이었다. 조용필, 신승훈, 전영록, 혜은이, 정수라, 나미 등 70~80년대의 히트 가요들을 편곡하여 우리 대중음악의 질을 업그레이드시킨 음악가 김명곤의 삶을 재조명했다. 우리 대중문화의 역사를 복원한 의미가 컸고, K-팝의 저력이 하루아침에 이뤄진 게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해 주었다. 음악계에서 전설처럼 회자되던 미공개 음원을 발굴·소개한 것도 의미가 컸다. 배우 김명곤과 같은 1952년생이지만 동명이인이다.

안타깝게 탈락한 두 작품도 결코 가볍지 않다. tbn충북의 <음악다큐 - 신경림을 들어본다>(연출 강성용 최하나)는 충북 중원 태생의 민중시인 신경림의 작품세계를 소개하고 그의 시로 만든 노래를 감상했다. tbn경인 <항일을 노래하다, 인천 아리랑>(연출 홍석훈)는 19세기말 개항의 격랑 속에서 꾸준히 불린 인천 아리랑의 사연을 알아보았다. 라디오 작품상 출품작들은 모두 지역에 밀착된 소재를 깊이 있게 취재, 지역 방송의 필요성과 존재 의의를 각인시켰다. 

라디오 시사교양드라마 부문은 tbn충북의 <르포 - 오송 지하차도 참사 트라우마 보고서 ‘안고 산다’ 2부작>(연출 박태성 강성용 최예은)이 수상했다. 배우 강신일의 호스팅으로 2023년 참사가 남긴 과제를 점검했다. 피해자를 대상으로 3개월에 한 번씩 네 차례 설문조사를 실시하고 기자회견, 토론회, 추모제를 동행하여 그들의 목소리를 담아냈다. 인터뷰를 강요하여 피해자들의 트라우마를 덧나게 하는 대신 자연스레 그들과 함께하며 생생한 속마음을 이끌어 낸 제작진의 자세가 인상적이었다. 이렇다 할 대책을 내놓기는커녕 오히려 시민분향소를 철거하는 등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한 관계 당국을 강하게 고발, 지역 방송의 공적 역할을 다했다.

라디오 특집 부문은 MBC <이종환의 밤으로의 초대 - 김민기>(연출 남태정), 지역정규 부문은 tbn강원×경인 <느리지만 아름다운, 실버카펫 라이드>(연출 채하나 고신희 홍석훈), 지역특집 부문은 부산영어방송 <손끝 요리사 : 인생을 요리하다>(연출 김유은)가 차지했다. 하나하나 소중한 작품들이다. 

SBS '이호의 2호를 찾아서'
SBS '이호의 2호를 찾아서'

‘악천후’에도 프로그램 풍년

디지털콘텐츠 부문은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가서 법의학의 세계를 알아 본 <이호의 2호를 찾아서>(연출 도준우 김유정 김아영 이수민)가 수상했다. 법의학자 이호 교수가 후계자를 찾는 콘셉트로, 유튜브 누적 조회 350만회 등 큰 반향을 일으키며 법의학의 중요성을 알렸다. 공로상은 서울시 출연기관에서 해제돼 어려움을 겪고 있는 TBS PD협회에 돌아갔다. 생계 위협 속에 채널 정상화를 위해 애쓰고 있는 TBS PD들에게 연대의 뜻을 담은 상이다. 

제38회 한국PD대상을 돌이켜 보니, 수상작은 물론 탈락작 중에도 뛰어난 작품이 많았다. 심지어 왜 이 좋은 작품을 출품하지 않았을까, 아쉬움을 남긴 프로그램도 있었다. 아무튼, 2024년은 방송계 안팎의 조건이 ‘악천후’에 가까웠는데도 프로그램은 풍년이었다. 이제 2025년도 4월을 너머 5월로 간다. 6월에는 대통령 선거가 있을 것이다. 우리 PD들이 좀 더 나은 조건에서 신명나게 프로그램에 몰두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그 풍성한 결과를 나누는 기쁜 시간이 다시 찾아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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