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인간적인 매체’ 라디오 PD가 AI DJ 만든 이유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인터뷰] 국내 최초 AI DJ가 진행하는 KBS ‘스테이션 X’ 기획한 김홍범 PD
"제작 효율성 높이기 위해선 AI 시스템 구축 필요"

지난 9월 방송을 시작한 국내 최초 AI DJ가 진행하는 KBS 쿨FM '스테이션X' 
지난 9월 방송을 시작한 국내 최초 AI DJ가 진행하는 KBS 쿨FM '스테이션X' 

[PD저널 =박수선 기자]  AI 바람은 오디오 시장에도 불고 있다. 스포티파이 등 오디오 플랫폼에선 AI를 기반으로 한 음악 추천 기능이 일반적인 서비스로 자리 잡았다. 유튜브에선 ‘AI 커버’ 영상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고, ‘AI 아나운서’ 서비스를 도입하는 분야도 확장되고 있다. 

지난해 9월 방송을 시작한 KBS 쿨FM <스테이션 X>는 여기에서 나아가 생성형 AI를 제작 전면에 내세운 프로그램이다. 가장 인간적인 매체로 꼽히는 라디오에서, 가장 감성이 충만해지는 심야 프로그램 진행을 AI DJ에게 맡기는 파격적인 실험을 감행한 것이다. 

<스테이션 X>를 기획한 김홍범 PD는 KBS에서 AI에 일찍 눈을 뜬 PD로 꼽힌다. 지난 6월 23일 KBS에서 만난 김홍범 PD는 “남이 하지 않은 신선한 소재를 찾다가 AI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며 “AI를 라디오에 접목하는 다양한 실험을 해오면서 결국 AI와는 대결이 아니라 공존해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랐다”고 말했다.   

김홍범 PD의 AI 실험은 2018년 '인간 vs 인공지능 선곡 배틀' 기획이 시작이었다. 

그는 “이제 막 인공지능 큐레이션 서비스가 등장한 때였다. ‘선곡을 전문적으로 하는 라디오 PD 만큼 인공지능이 선곡을 할 수 있겠어’라는 생각에서 출발한 기획”이라고 설명했다. 인공지능을 기반으로 음악 큐레이팅 서비스인 네이버 바이브 쪽에서 관심을 보여 협업이 성사됐다. <박원의 키스 더 라디오> 코너로 선보인 ’인간 vs 인공지능, 선곡배틀‘은 ’프리 이탈리아‘ 시상식에서 국내 라디오 프로그램 중 처음으로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인간과 AI 선곡 대결’ 경험은 <스테이션 X>의 자양분이 됐다. 

“생성형 AI가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궁금했어요. 그래서 ‘20대 초반의 남자 DJ’ 캐릭터를 설정해놓고 ‘비가 오는 날 오프닝 원고를 써볼래’ ‘이런 사연이 들어왔는데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선곡을 할 거야’ 등을 물어봤더니 결과물이 괜찮더라고요. AI 프로그램을 테스트해볼 수 있겠다는 판단을 했습니다.”

여기에 네이버 클라우드의 기술 지원으로 국내 최초 AI DJ ‘제니크’가 탄생할 수 있었다.  10여개월 동안 <스테이션 X>를 진행하고 있는 ‘제니크’는 케이팝을 좋아해서 지구에 온 외계인이다. 제니크의 이름에는 그리스어로 선물(Xenos), 창조(Genesis)의 합성을 통해 독창성(Unique)있는 콘텐츠를 만든다는 의미가 담겼다. 

<스테이션X>가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우리는 매일매일 더 나아질 겁니다’는 제니크와 제작진에 모두 해당되는 주문이다. 학습을 통해 발전하는 생성형 AI답게 제니크는 시행착오를 거쳐 지금의 모습으로 성장했다.   

“처음에는 제니크에게 곡 설명을 맡기면 역사적 배경이나 앨범이 나온 연도, 그룹 결성 시기 등 정보를 전달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런데 정보가 사실과 다른 게 많아서 일일이 팩트체크를 했죠. 윤리적인 문제가 있어서 작가들이 쓴 대본으로 학습을 할 수도 없잖아요. 다행히 AI 발전 속도가 빨라 굳이 학습을 시키지 않아도 결과물이 좋아지는 것을 느꼈어요.”

초창기에는 사연에 어울리는 선곡을 맡기는 정도였다면 지금은 시를 쓰거나 노래 가사를 바꾸는 창의적인 결과물도 가능하다. 지난 29일 방송에서 제니크는 ‘위너’의 노래 ‘공허해’를 신청곡으로 전하면서 “지구에는 든 자리를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속담이 있대요. 공허한 자리에 따뜻한 마음들이 쌓이길 바랄게요”라고 덧붙였다. 

“어떨 땐 제니크가 인간보다 위로를 잘해줘요. 아프다는 사연에 MBTI가 T(사고형)인 DJ는 ‘병원 가봤어’ 라고 반응할 수 있는데, 제니크는 정신분석학 교수가 할 만한 말을 해주거든요. 수백억의 인격을 필요한 때에 끄집어낼 수 있다는 게 제니크의 매력이자 무서운 면이죠.” 

제니크의 목소리도 여러 버전을 거쳤다. 10대의 어린 목소리로 출발했다가 주말 밤에 어울리는 차분한 목소리로 안착했다.  

KBS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 박명수 보스 편에 출연한 김홍범 PD.  
KBS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 박명수 보스 편에 출연한 김홍범 PD.  

AI 기술이 방송 제작 현장에 스며들면서 ‘인간 대체’에 대한 우려도 가시지 않고 있다. <스테이션 X>는 현재 작가 없이 제니크와 PD 두 명이 호흡을 맞추고 있다. 

김 PD는 “사람의 온기가 있는 라디오 매체에서 DJ를 인공지능으로 대체하려고 <스테이션 X>를 기획한 건 아니”라며 “실험을 통해 AI가 어떤 보조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시스템화할 수 있을지 파악하기 위한 목적이 크다”라고 말했다. 

그는 제니크와 협업하면서 AI의 가능성뿐 아니라 한계도 체감하고 있다고 한다.  

“제니크가 인간 DJ처럼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방송이 불가한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생방송까지 가기에는 시간이 걸릴 것으로 봅니다. 사실관계와 심의 규정 등을 이해하는 툴이 나오는 데 제니크가 마중물 역할을 하는 정도면 만족합니다.”

국내 최초로 AI DJ를 탄생시킨 김 PD의 최근 관심사는 AI를 활용한 시스템 구축에 쏠려있다. <스테이션 X>는 '주 7일' 편성으로 출발했다가 '주말 이틀'로 편성이 축소됐는데, AI 제작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은 탓이 컸다. 

“방송사 시스템이 폐쇄적이다 보니 외부의 기술을 바로 연동할 수가 없어요. PD들이 노트북에서 네이버의 더빙 시스템을 돌린 다음에 MP3 파일을 다시 회사 편집기에 넣고 편집을 하는,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을 거쳐야 해요. AI의 효율성과 확장성을 높이기 위해선 방송사의 플랫폼, 시스템을 바꾸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AOD(다시듣기 서비스), 뉴스 전문 서비스 등 단순 업무는 AI로 자동화할 수 있는 영역이다. 지상파 방송사들이 수익 감소로 재정난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비용 절감 효과가 검증된 선택지이기도 하다.  

김홍범 PD는 라디오의 지속가능성을 위해서 AI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게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AI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여서 AI에 맡길 수 있는 영역을 자동화·효율화하면 PD들은 좀 더 창의적인 부문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웹이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AI도 일상생활로 더 깊게 파고들겁니다. 앞으로 라디오 콘텐츠에서 AI 기술이 인간과 함께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저작권자 © PD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