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PD연합회가 신입 PD들의 제작 능력 개발과 PD 선후배 간 네트워크 형성을 위해 마련한 신입PD 캠프가 지난 9월 2일부터 6일까지 노보텔 앰배서더 수원에서 열렸다. 신입PD 캠프에 참여한 이호원 PD의 참가기를 싣는다. -편집자 주 |
[PD저널 =이호원 MBC PD] 일주일 내내 개구리가 된 기분이었다.
첫 번째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 AI와 숏폼에 대한 강의를 들을 때면, 이거야 원 “콘텐츠의 트렌드나 유행이 좀 바뀌네?” 수준이 아니라 아예 시장의 판도 자체가, 우물 바닥이 통째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 우물은 사실 내 머리통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두 번째 개구리가 됐다. 끓는 물에 퐁당 빠지면 바로 튀어나올 텐데, 그렇게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미지근한 물에 담긴 개구리. 위기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개구리. 당장은 월급이 들어오고, 조연출일은 바쁘고, 오늘도 집에 가면 달콤한 넷플릭스가 기다리니까. 그러다 물이 천천히 뜨거워지면… 그대로 익는다. 맛있게.
그러니 결론은 뻔했다. 스스로 물 밖으로 기어 나와야 한다. 이제 갓 PD가 된 우리 신입PD들은 앞으로 20~30년은 일해야 하는데, 어쩌면 우리는 TV보다도 뉴미디어, 숏폼, OTT에서 일을 더 많이 하는 첫 번째 세대가 될 운명일지도 모르는데. 갑자기 설레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서웠다.
“지금은 창작자가 중심이 되어서 기술용역을 외주로 주는데. 정말 나중에는 기술자가 중심이 돼서 창작을 외주 줄 수도 있다. 플레이브 보세요. 결국 블라스트(CG회사)가 중심이 돼서 만들고 있잖아요. 기술을 가지고 있는 것이 권력이 되는 시대가 올지도 몰라요.” -조영신 AI 박사 (미디어연구소 bLanC 대표)
“숏폼을 영상콘텐츠의 한 종류로만 보면 곤란하다. 이건 커머스와 마케팅이다. TV-시청자의 관계를 크리에이터-팬으로 뒤바뀌고 있다.” -정재훈 틱톡코리아 운영총괄 (바이트댄스코리아 대표)
5년 전, 생성형 AI가 처음 고개를 내밀었을 때 영화감독을 꿈꾸고 있던 나는 ‘곧 AI가 영화를 찍어줄 날이 올 테니 그날을 준비하자’ 다짐했었다. 마침내, 그날이 왔다. 그런데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그 사이 나는 뭘 하고 있었나? 미지근한 물이 담긴 우물 속에 갇혀 있었다. 그래, 이 우물에서 나가야 할 필요성은 알겠는데, 그럼 어떻게 나가나?
선배 PD들의 강의는 또 달랐다.
AI와 뉴미디어 수업이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이야기였다면, 이건 당장 내가 피부로 느끼는 세계의 이야기니까. <더커뮤니티: 사상검증구역>의 권성민 PD, <나는 신이다>의 조성현 PD, <1987>의 김경찬 시나리오 작가의 목소리는, 실무의 언어였다. 그들의 콘텐츠 분석법은 TV건 유튜브건 숏폼이건 장르를 가리지 않고 통하는 기저의 문법이었다.
“스펙터클 (볼거리)과 참여(공감). 이 두 가지를 모두 갖춰야한다. 앞으로 다른 콘텐츠를 볼 때는 항상 이 두 가지를 가지고 분석해 보길. 그리고 내 콘텐츠의 볼거리는 뭐지? 그리고 그걸로 후킹해서 들어온 다음에는 어떤 공감포인트로 붙잡아둘 거지?”-<더커뮤니티; 사상검증구역》 권성민PD
“왜 이나영-원빈 커플보다, 이상순-이효리 커플에게 더 눈이 갈까? 미남과 미녀보다, 미녀와 야수가 더 재밌는 이유이지는 않을까? 내가 만드는 콘텐츠의 ‘간극’, ‘충돌’, 다시 말해 ‘아이러니’는 어디 있는가?”-<1987> 김경찬 작가
“회사에서 막혔던 기획을 넷플릭스에서 성공시켰다. 후배 장호기PD의 <피지컬 100>도 마찬가지였다. 여러분, 하고 싶은 게 있으면 꼭 해야 한다. 회사말을 너무 절대적으로 들을 필요는 없다.”-<나는 신이다> 조성현 PD
그리고 매일 밤, 캠프에 참가한 신입 PD들끼리 맥주잔을 부딪혔는데, 대화의 소재는 '주로 MBTI가 뭐예요', 연애 이야기, 요새 유행하는 드라마 이야기...였을 리 없다. 그런 이야기로 시작해도 자연스럽게 그날 들은 강의 내용으로 귀결되었다. 서로의 의견과 경험을 공유하고, 그래서 시사교양PD는 어떻게 할 건지, 예능PD는 어떻게 할 건지, 라디오는 어떻게 할 건지, 지역방송은 어떻게 할 건지. 자고 일어나면 달라지는 시대에, 콘텐츠 창작자는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열띤 토론이 이어졌다. (대부분 조연출 업무에 대한 한탄으로 귀결되었지만)
그렇게 술 한잔까지 곁들인 복습까지 마치고 나면, 어쩌면 PD라는 직업의 정의는 누군가 내려주는 게 아니라 나 스스로 내려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이 기술들을 내가 직접 나서서 배우지 않으면, 스스로를 새로운 환경에 노출시키지 않으면 도태되기 너무나 쉽겠구나. 아무도 나에게 떠먹여 주지 않는구나. PD라는 직업은 내가 무슨 일을 할지, 뭘 만들지, 플랫폼은 어디서 만들지를 직접 정의하는 직업인지도 몰라.
그게 아니라면 그저 촬영하고 편집하는 직장인이 될 뿐이다. 스스로 고착화되기를 거부하고, 계속 새로운 기술과 환경에 노출되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우물 밖으로 장대높이뛰기를 시도한다면. 마치 공주님의 키스를 받아 왕자가 된 개구리처럼, 우리도 언젠가는 글로벌 히트 IP를 만드는 PD가 될 수 있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