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저널 =방연주 대중문화평론가] 드라마 속 여성들이 단순히 ‘여성이 주인공’이라는 구도에 그치지 않고 캐릭터의 다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기존 드라마 문법에서 금기되거나 이면으로만 존재했던 소재와 결합한 작품들이 주목받고 있다. 미디어 환경이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중심으로 바뀌면서 장르의 지형이 달라진 영향도 있지만, 동시에 다양한 스토리텔링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여성 서사의 스펙트럼도 한층 넓어지고 있다. 여성 캐릭터의 변화는 트렌드를 넘어 드라마의 서사 구조와 장르적 특성을 재편성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숨은 이야기와 소재의 파괴
넷플릭스 <은중과 상연>은 두 여자의 삶을 다룬다. SBS<달콤한 나의 도시>를 집필했던 송혜진 작가는 이번 작품을 “자기 자신을 수용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라고 밝혔다. <은중과 상연>은 우정과 갈등을 넘어 존엄사를 부탁하는 친구와 동행하는 과정을 담는다. 15부작 긴 호흡으로 이야기를 펼친다. 은중(김고은)과 상연(박지현)은 10대 때 만나 우정을 쌓고, 20대 때 재회해 첫사랑을 둘러싼 갈등을 겪는다. 30대 때 같은 업계에 일하면서 서로의 삶이 얽히고, 40대에 이르러 두 사람은 화해와 용서를 구한다.
시리즈 공개 직후 ‘조력 사망’이라는 설정에 관심이 쏠렸지만, 드라마는 두 인물의 진실과 오해가 교차한 순간들을 포착한다. 하나의 단어로 규정하기 어려운 우정에 깃든 미묘한 긴장감과 함께 삶과 죽음에 대한 태도로 시선을 확장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디즈니플러스 <북극성>은 서문주(전지현)가 극의 구심점을 맡은 여성 원톱 드라마다. 겉으로 보면 부족할 것 없어 보이는 문주는 유엔대사직을 내려놓고 유력 대선후보인 남편을 돕기로 결단을 내린다. 그러나 남편이 간첩으로 몰려 의문의 피격을 당하면서 삶은 전환된다. 서문주는 진실을 추적하기 위해 직접 대선에 출마하는 등 강단 있고 거침없는 면모를 드러낸다.
드라마 <작은 아씨들>에 이어 김희원 감독과 다시 의기투합한 정서경 작가는 “힘 있는 여성이 등장하는 한국적 첩보물을 쓰고 싶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서문주는 외교, 안보, 테러 등 장대한 서사를 이끌어간다. 문주 곁에는 극의 완급을 조율하는 여성 인물들이 자리한다. 문주의 킹메이커로 나선 시어머니 임옥선(이미숙), 그들과 대립하는 현직 대통령 채경신(김해숙)의 존재는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프랑스 드라마가 원작인 SBS<사마귀: 살인자의 외출>에서 정이신(고현정)은 연쇄살인범이자 복수자다. 정이신은 폭력을 일삼는 남편으로부터 아들을 지키기 위해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른다. 가정폭력과 아동학대를 저지르는 다섯 명의 남자를 잔혹하게 죽인다. 이러한 엄마를 증오하는 형사 아들(장동윤)은 모방범죄 수사로 인해 서로 얽힌다.
연출을 맡은 변영주 감독은 “범죄자 엄마와 경찰 아들 사이의 모성애와 그리움은 전형적이고 너무 익숙하다고 생각했다”며 “오히려 모자지간이지만 세계관과 환경이 다른 두 사람이 어떻게 서로를 바라보고 사건을 해결해가는지 그 과정을 보여주고자 했다”라고 밝혔다. 정이신은 ‘모성애’나 ‘정의실현’으로 면죄부를 받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광기를 고스란히 드러내며 가해자의 서사에 무게를 싣지 않는다.
장류진 작가의 장편소설을 드라마화한 MBC<달까지 가자>에서는 마론제과에서 일하는 세 명의 ‘흙수저’ 여성들이 등장한다. 일도, 삶도, 취향도 모든 게 무난한 이들에게 ‘그 이상의 무엇’이란 없다. 궁여지책으로 다른 선택을 한다. 월급만으로 생존하기 어려운 세상, ‘코인 투자’에 뛰어든 것이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나아지지 않는 팍팍한 현실과 사회구조 속에서 탈출을 갈망하는 욕망을 ‘코인 투자’라는 장치를 통해 드러낸다.
이 밖에 KBS<은수 좋은 날>에서는 강은수(이영애)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우연히 얻은 마약 가방으로 위험천만하게 동업하면서 벌어지는 고군분투를 담아내고 있다. MBC<백번의 추억>은 1980년대 버스 안내양 영례와 종희의 우정을 그린다. 또 최근작인 넷플릭스<애마>, JTBC<정숙한 세일즈>에서는 ‘에로영화’, ‘성인용품 방문판매’ 등 금기시된 소재로 당대 여성의 현실과 역할을 재조명했다.
‘여적여’에서 연대로: 여성 캐릭터의 진화
드라마 속 여성 캐릭터는 끊임없이 진화해왔다. 1990~2000년대 여성 캐릭터는 전통과 변화 사이에서 분열된 모습을 보였다. 가부장제 질서 안에서 엄마, 아내, 며느리라는 제한된 위치에 머물며 가정 내 갈등의 중심에 서는가 하면, 백마 탄 왕자에 의해 구원받는 ‘신데렐라형’ 캐릭터로 소비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외환위기(IMF) 이후 생존경쟁이 격화되면서 직장에 진출한 ‘일하는 여성’으로 표상되었다. 그러나 사회적 지위를 획득한 여성 캐릭터조차 로맨스 구도 속에서는 남성의 인정이나 사랑을 통해 완성되는 경우가 많았다. 독립적 주체라기보다 남성 서사의 부속물로 소비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흐름이 이어지는 동안 드라마의 극적 긴장감을 형성하는 핵심 장치는 ‘여적여’(여성의 적은 여성) 프레임이었다. 여성 캐릭터들은 서로를 질투하고 경쟁하는 존재로 그려졌고, 가사·직장·연애의 장에서 끊임없이 충돌했다. 여성 캐릭터의 선악 대비는 극적 긴장감을 높이는 장치로 효과적이었지만, 동시에 여성 캐릭터를 타자화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여성 캐릭터는 경쟁과 적대의 맥락 속에서만 유의미했고, 이는 여성 정체성을 협소하게 규정짓는 한계로 작용했다.
그러나 2010년대 이후 젠더의식과 다양성 담론이 확산하면서 여성 캐릭터는 전환점을 맞이했다. 서로를 적대하거나 남성의 구원에 기대는 존재가 아니라 연대와 지지를 통해 서사를 주도하는 인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장르와 소재도 다양해졌다. JTBC<힘쎈여자 도봉순>과 같은 여성 히어로물에 이어 JTBC<서른, 아홉>, tvN<술꾼도시 여자들> 등에서는 세대와 상황을 넘어 서로의 삶을 지탱하는 연대의 서사가 등장했다.
앞서 언급한 tvN<작은 아씨들>에서는 주인공도, 조력자도, 악역도 모두 여성이 나왔다. 자폐스펙트럼을 지닌 변호사의 이야기를 다룬 ENA<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학교폭력의 피해자가 복수의 판을 설계해 처절하게 갚아주는 넷플릭스<더 글로리>는 여성 원톱 드라마로서 국내외에서 화제를 모았고, 여성 서사의 스펙트럼도 넓혔다.
여성성에서 인간성으로: 넓어진 서사의 지평
오늘날 한국 드라마 속 여성 캐릭터는 더 이상 가정과 로맨스에 종속된 주변인이 아니다. ‘여적여’ 구도로 소모되던 인물에서 벗어나 주체적 선택을 통해 서사를 이끄는 중심 인물로 확장되었다. 이들은 권력과 정의, 돈과 복수라는 주제를 넘어 삶과 죽음, 존엄과 욕망 같은 인간의 보편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중요한 점은 여성 서사가 단순히 ‘여성이 주인공인 이야기’에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성별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더라도, 인간으로서의 복잡성과 다층성을 표현하고 있다. 선악이 불분명한 회색지대까지도 나아가고 있다. 앞으로도 여성 서사는 ‘여성 이야기’라는 틀을 넘어 인간 서사의 확장된 가능성을 보여주는 장르로 자리매김하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