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저널 =홍수정 영화평론가] 최근 극장가에서 조용히 돌풍을 일으키는 작품이 있다. <우리들>과 <우리집>을 통해 아이들의 섬세하고도 복합적인 세계를 그린 윤가은 감독의 신작, <세계의 주인>이다. 개봉 전부터 입소문이 자자했던 작품이기도 하다.
영화는 10월 22일 개봉 후 박스오피스 9위를 기록하다가, 관객의 뜨거운 호응에 힘입어 일주일 만에 박스오피스 7위, 관객 수 3.4만을 기록했다. 독립영화로서 상당한 스코어. 이미 '올해의 한국영화'로 꼽는 이도 적지 않다.
하지만 <세계의 주인>은 한마디로 정리하기 어려운 영화다. 그것이 건네는 감동은 크지만 그 실체를 매끈한 단어로 포획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건 <세계의 주인>이 몹시도 여리고 희미한 여러 겹의 서사와 인물, 그들의 감정과 사정을 매우 정교하게 겹쳐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따로 떼어놓고 볼 때 흐릿한 그 조각들은 서로 얽히고 뭉쳐 아름다운 한 덩이의 세계로 다가온다.
그 안을 즐거이 헤맨 끝에 나는 하나의 길을 완성했다. 정답은 아니겠지만, 영화를 무사히 관통하는 하나의 샛길. 그 여정을 따라가며 본 <세계의 주인>은 "닦아내는 영화"다. 그래서 오늘은 먼지를, 얼룩을, 눈물을 지워내는 그 손길에 대해 말해보려 한다. 아래부터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으니 유의해 주길 바란다.
<세계의 주인>에는 마치 아지랑이처럼 손에 잡히는 듯하다가 어느새 사라지는 것들이 많이 등장한다. 제자리에 단단히 정박하는 대신, 잠시 나타났다가 없어지는 것들. 예를 들어 주인(서수빈)의 아빠가 그렇다. 그는 있지만, 없는 것 같은 사람이다. 물론 여기에는 사정이 있다. 하지만 그 사정이 아빠라는 존재가 내뿜는 불안을 상쇄하지는 못한다. 또 주인과 남자친구의 관계도 그렇다. 그녀는 한 명의 남자친구와 오래가지 못하는 것 같다. 다정하지만 조금씩 흔들리는 관계. 밝은 얼굴의 주인이 곁에는 확실히 뿌리내리지 못한 채로 부표하는 것들이 있다.
주인이의 짓궂은 농담도 그렇다. 사과가 죽도로 싫다는 장난, "나는 성폭행 피해자"라는 농담(처럼 보인 말)은 그 안에 든 진심의 농도를 가늠하기 전에 어느샌가 사라져 버린다. 그녀는 어째서 이런 농담을 하는 걸까. 아직은 순도 100%의 진심을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일까? 가벼운 웃음 없이는 아픈 진실을 마주보기 힘들어서. 그렇게 생각하면 동생 해인(이재희)이 마술을 자주 선보이는 이유도 알 것 같다. 그는 편지에 진심을 꾹꾹 눌러쓴 다음, 그것을 마술로 없애려 한다. 그때 해인이가 없애고 싶은 것은 편지에서 드러나는 아픈 과거일지 모른다. 이들 남매는 쾌활한 웃음으로, 어여쁜 손동작으로 그들의 상처를 허공에 날리려 한다.
하지만 이런 시도에도 불구하고, 어떤 것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 영화의 결정적 장면. 세차장 씬에서 주인은 가슴 저 아래에 묻어두었던 울음을 쏟아낸다. 주인은 "이제 괜찮다"라고 하지만, 그리고 종종 진짜로 괜찮지만, 어떤 상처는 끝까지 남아 용암처럼 솟구쳐 올라 사람의 마음을 그슬린다. 해인이는 친구들에게 '소원을 적은 쪽지'가 사라지는 마술을 선보인다. 하지만 쪽지들은 탁자 아래로 우르르 쏟아져 모두에게 모습을 드러내고 만다. 소원을 적은 종이처럼, 진심은 언젠가 언젠가 세상 밖으로 튀어나와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법이다.
하지만 <세계의 주인>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이다음에 이어지는 순간이 정말로 중요하다. '탁자 밑에 쏟아진 쪽지' 이미지는 다음 장면에서 '강물 아래에 쌓인 쓰레기' 이미지와 만난다. 마치 쪽지들이 모여 거대한 쓰레기를 이룬 것 같은 인상이다. 주인은 그것들을 주워 커다란 봉투에 담는다. 그리고 다음 장면, 주인과 비슷한 아픔이 있는 미도(고민시)와 봉사모임 사람들이 함께 모여 청소를 한다. 그저 쓰레기를 깨끗하게 치우는 그 동작이 편안하게 다가오는 까닭은, 마음의 얼룩마저 지우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세차장 씬에서 주인이 한바탕 울고 나자, 엄마가 말한다. 한 바퀴 더 돌자고. 이때 차를 깨끗하게 닦아내는 기계의 움직임에서 주인의 상처를 씻어주려는 영화의 손길을 느꼈다면 과장일까. 함께 언급해야 할 장면이 있다. 미도의 재판 시퀀스. 친족 성폭행을 의심하는 아니, 미도의 멍든 역사를 부인하는 변호인의 말이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던 순간. 인주(백현주)는 방청석에서 튀어나와 미도에게 조심스레 손수건을 건네준다. 그 손수건에 기대어 미도는 눈물을 닦는다. 이 에피소드는 봉사모임의 청소 씬에서 다시 한번 자랑스럽게 언급된다.
그러니 나는 <세계의 주인>을 이렇게 부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닦아내는 영화라고. 이 씩씩한 사람들은 상처가 새겨진 마음을 안고도 부지런히 무언가를 닦는다. 서로의 눈물을 닦고, 지저분해진 바닥을 닦고, 피떡이 진 시간을 닦는다. 하지만 얼룩은 계속 생겨난다. 영화는 그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상처는 그리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이들은 자꾸 보낼 수 없는 편지를 쓰고는 바닥에 버리고, 예상치 못한 순간에 오열하곤 한다. 그 자국은 쉽게 지워지지 않겠지만, 이들은 다시 닦아낼 것이다.
<세계의 주인>에서 인물들을 괴롭히는 것들은 말과 글자로 존재한다. 주인에게 온 쪽지, 서명운동 속의 문구, 삼촌이 쓴 편지, 그리고 미도에게 향한 변호사의 말까지. 그 텍스트를, 기억을 지운들 몸에 새겨진 멍까지 사라질까. 누가 이들 앞에게 용서와 회복을 언급할 수 있을까. 피해자의 자리에 머물든 일어서든. 괜찮아지든, 혹은 다시 앓든. 그 모두는 온전히 그들의 몫이다.
다만 녹록잖은 현실 앞에서 <세계의 주인>은 조심스레 말을 건넨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 그리고 다시 저지레를 해도 괜찮다고. 언제든 어질러진 자리를 닦아주겠다고. 그 단순하고 성실한 손길이 주는 위안은 단단하여 마음을 맡길 수 있을 것 같다.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