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저널 =정길화 동국대 한류융합학술원장] 최근 드라마 <태풍상사>가 tvN과 넷플릭스를 통해 주목받고 있다. 이 드라마는 IMF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을 배경으로, 부도 위기에 몰린 중소 무역회사 ‘태풍상사’에서 펼쳐지는 청춘들의 분투를 담는다. 웃음과 눈물이 교차하는 이 드라마는, 그 시절을 살아낸 이들에게는 추억을 소환하고, 그 이후 세대에겐 시대적 감수성을 전해준다. 80·90년대 레트로 콘텐츠의 열풍은 <응답하라 시리즈>에서 <태풍상사>에 이르기까지 여전하다. 필자에게도 이 시기는 현장에서 치열하게 프로그램을 제작하던 시기였기에 더욱 각별하다.
돌이켜 보면, 바로 이 시대야말로 K-콘텐츠의 씨앗이 뿌려진 시기였다. 때로는 우연처럼, 때로는 권력의 의도와는 반대로 작용한 정책의 결과로 한국은 ‘콘텐츠 강국’으로 가는 길을 내디뎠다. 이제 그 시간들을 정리하며, 오늘날 K-콘텐츠 전성시대의 토대를 어떻게 닦았는지를 살펴볼 때이다.
1980년대: 권력과 콘텐츠의 기이한 교차
1980년 11월, 전두환 신군부는 ‘건전한 언론 육성’을 명분으로 전격적인 언론통폐합을 단행한다. 동양방송(TBC), 동아방송(DBS)은 KBS에 흡수되었고, CBS는 보도 기능을 박탈당했다. 수백 명의 언론인이 강제해직으로 거리로 내몰렸다. 권력은 공영방송 체제라는 포장 아래 사실상 방송을 순치시키고 나아가 장악했다.
이와 함께 추진된 것이 이른바 ‘3S 정책(Screen, Sports, Sex)’이다. 국민의 정치적 각성을 차단하고, 관심을 분산시키기 위한 오락 중심 정책이었다.(이 시대를 그린 레트로 콘텐츠로는 넷플릭스 드라마 <애마>가 있다.) 영화 등급 완화, 프로 스포츠 활성화, 섹스 코미디의 범람은 모두 이 정책의 부산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우민화 정책’이 대중문화 성장의 기폭제가 된다.
1981년,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국풍81’은 국가 주도의 거대 이벤트의 서막이었다. 이어서 88서울올림픽 유치에 성공한 신군부는 올림픽에 정권의 명운을 걸었고, 이는 사회 전반의 역량을 동원하는 빌미가 된다. 방송기술의 고도화, 연출 인력의 양성, 국제 중계 노하우 축적 등은 K-콘텐츠를 준비하는 숨은 인프라가 되었다.
올림픽은 확실히 5공 세력의 ‘정치적 판단과 목적’으로 시작했다. 유치 신청에서 개최까지 철저히 그러하다. “지금 우리 입장에서 올림픽보다 중요한 게 있어요?”, “88까지는 암짝 소리 말아라!”... 그 시절 참으로 자주 듣던 말들이다. 80년대에 한국 사회의 모든 역량은 올림픽에 집중되었다. 몰빵이었고 양날의 칼이었다. 결과적으로 올림픽 유치는 평화적 정권 교체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되었다. 88올림픽은 순응과 거부, 긍정과 부정의 모순적 사건이다.
당시 KBS를 비롯한 지상파 방송사들은 올림픽 중계 경험을 통해 세계적 표준의 방송 역량을 확보하였으며, 개폐회식 연출을 통한 ‘문화적 브랜딩’ 경험도 이 시기에 시작된다. 국내외 시청자들은 처음으로 ‘한국 문화’를 시청각 콘텐츠로 경험하기 시작했다.
규제 속 성장, 제도 밖 창조성
1980년대 콘텐츠 환경은 외형적으로는 국가의 철저한 통제 속에 놓여 있었지만, 그 안에는 예상치 못한 진화의 흐름이 형성되고 있었다. 통행금지 해제, 교복 자율화, 청소년 문화 확산 등은 대중문화의 급속한 저변 확대를 가능하게 했다.
이 시기에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한 방송 소비층이 탄생한다. <쇼비디오자키>, <젊음의 행진>, <퀴즈 아카데미> 등의 인기 프로그램은 청소년을 TV 앞에 모이게 했고, 이들은 훗날 콘텐츠 소비 세대이자 제작 세대로 성장하게 된다.
또한, 한국의 방송사는 올림픽이라는 거대한 이벤트를 치르며 방송장비, 제작기술, 인력 구성에서 비약적인 도약을 이루게 된다. 비록 자유로운 제작 환경은 아니었지만, 이 시기에 축적된 기술력과 경험은 향후 방송사와 제작사로 확산되어 K-콘텐츠를 위한 토양이 되었다.
1990년대: 다매체 시대의 개막과 콘텐츠 산업화
1987년 민주화 이후, 1990년대는 제도적 자유와 기술 혁신이 동시에 진행된 시기였다. 1995년 케이블 TV 도입은 콘텐츠 생태계에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지상파 일변도의 방송 체제는 다채널 구조로 전환되고, 프로그램 공급자(PP)와 종합유선방송(SO)이라는 새로운 구조가 등장한다.
이는 장르의 전문화와 다양화, 실험 콘텐츠의 제작을 가능하게 한다. 게임, 애니메이션, 음악, 드라마 등 장르별 채널이 등장하고, 특히 ‘뮤직비디오’와 ‘아이돌 중심의 음악방송 포맷’은 이 시기 정착되며 K팝 산업의 기틀이 된다.
한편, 정부도 문화산업에 대한 제도적 지원을 강화하기 시작한다. 1990년 문화부 신설, 1994년 문화산업국 설치, 1999년 ‘문화산업진흥기본법’ 제정 등 일련의 정책은 콘텐츠를 ‘산업’으로 인식하고 국가 동력으로 육성하려는 흐름이었다.
김영삼 정부 당시 대통령이 주재한 과학기술자문회의에서 “헐리우드 영화 <쥬라기 공원>이 현대차 150만대의 수익과 같다”는 슬로건이 등장한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일이 되었다. 김대중 정부는 콘텐츠 산업을 정보통신산업과 함께 전략산업으로 간주했고, 이 시기에 ‘콘텐츠’는 단순한 문화가 아니라 수출 품목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다.
K-콘텐츠의 맹아: ‘한류’라는 이름의 탄생
1992년 한중수교 이후 <질투>, <사랑이 뭐길래> 등의 한국 드라마가 중국에 수출되기 시작한다. 동남아시아, 중국, 일본 등지에서 드라마와 음악 콘텐츠가 인기를 얻으면서 1999년 ‘한류’라는 용어가 처음 언론에 등장한다. 클론, H.O.T., 젝스키스 등 1세대 아이돌의 활약은 K팝 붐의 전조였다. 한류의 씨가 이때 뿌려졌다. “한류 1.0은 드라마, 한류 2.0은 K팝”이라는 공식이 이 때에 등장했다.
1997년 IMF 외환위기라는 국가적 위기 상황은 콘텐츠 산업에도 충격을 주었지만, 동시에 해외시장 진출의 계기로 작용한다. 위축된 내수시장을 대신하여 기획사들은 중국, 동남아 등 새로운 시장을 모색했고, 이로 인해 콘텐츠 수출 구조가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1996년 헌법재판소가 ‘음반·비디오물 사전심의제’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리며, 표현의 자유가 한층 확대됐다. 이는 창·제작자에게 자기검열의 족쇄에서 벗어나게 했다. 나아가 자율성과 실험성을 부여하였고, 이후 등장하는 K-콘텐츠의 다양성과 실험성의 기반이 됐다.
시사점: 무엇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K-콘텐츠 전성시대는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다. 1980년대의 통제 속 성장은 역설적으로 콘텐츠 산업의 양적 성장 기반을 만들었고, 1990년대의 제도적 변화는 그 질적 도약을 가능케 했다.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 교훈을 도출할 수 있다.
첫째, 정부 정책은 콘텐츠 생태계의 방향을 좌우할 수 있다. 제도적 틀과 자율성 보장, 규제 완화와 같은 간접적 정책이 훨씬 중요하다. 지원하되 개입하지 않는 ‘팔길이 원칙’은 여전히 소중하다.
둘째, 기술 발전과 매체 구조의 변화는 콘텐츠 생태계에 구조적 전환을 일으킨다. 90년대 케이블, 2000년대 인터넷, 2010년대 SNS, 2020년대 OTT에 이르기까지 기술은 K-콘텐츠의 지평을 넓혀왔다.
셋째, 위기는 새로운 전환의 기회가 될 수 있다. IMF 위기 속에서 콘텐츠 산업은 해외 진출을 모색했고, 그것이 ‘한류’의 본격적 서막이 되었다.
다시, ‘태풍상사’ 앞에 서서
<태풍상사>의 배경이 된 1998년, 그 시절은 혼돈과 가능성이 공존하던 시대였다. 실업과 절망, 동시에 새로운 산업의 태동이 있었다. 지금 K-콘텐츠의 환희는 어쩌면 그 시절의 역설적 유산일지 모른다.
오늘날 세계를 휩쓸고 있는 K-콘텐츠의 성과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방탄소년단(BTS), <기생충>, <오징어 게임>,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흑백요리사>, 로제의 <아파트>... 등 전 세계 대중문화의 중심에서 주목받고 있는 한류 콘텐츠는 역사와 시대의 산물이다. 특히 1980~1990년대는 콘텐츠 산업의 기반을 형성한 결정적 시기였다. 역설과 모순의 심정으로 이 시대를 반추하게 된다.
1980년대 신군부의 아이러니한 오락 진흥 정책과 1990년대 다채널 시대의 개막은 K-콘텐츠 전성시대를 이끈 중요한 역사적 기반이었다. 당시의 정책들은 현재 K-콘텐츠의 창의성, 다양성, 경쟁력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K-콘텐츠의 성공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격동의 시대 속에서 형성된 특정 정책과 환경 변화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임을 이해해야 한다.
콘텐츠는 시대의 거울이자 미래의 나침반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거울 앞에서 어떤 시대를 비추고 어떤 미래를 상상할 것인가. K-콘텐츠는 여전히 길 위에 있다. 우리는 다시 길을 묻는다. 그리고 답은, 어쩌면 그 시절 이미 시작되었다.
